일찍이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재난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노아 시대 현상들이 나타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가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함께 재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나타나시고, 또 어떤 새로운 사역을 가져오시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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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1) 주님의 약속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근데 당신들은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말세의 심판 사역을 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주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은밀히 오셨다고 증거하는 것과 왜 다릅니까?

답: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신다는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기에 주의 약속은 어김없이 다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할 건 주께서 성육신으로 다시 오셔서 말세의 심판 사역을 하시는데 이건 어떻게 들림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느냐와 관련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찾아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주께서 성육신으로 다시 오신다는 명확한 예언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눅 12:40)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눅 17:24~25) 이런 예언에 ‘인자가 오리라’ ‘인자의 강림’을 언급했는데 ‘인자’라 함은 사람에게서 태어나고,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약 영이라면 ‘인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영이시니 ‘인자’라 칭할 수 없는 것처럼 천사를 본 사람도 있지만 천사도 영이니 ‘인자’라 칭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형상은 있지만 영체에 속한다면 ‘인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인자,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으시고 평범한 정상 사람으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인자가 오리라’ ‘인자의 강림’은 다 말세에 하나님이 다시 성육신으로 오시는 걸 말합니다. 특히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고 하신 것은 주께서 성육신의 방식으로 오신다는 걸 더욱 증명합니다. 만약 성육신이 아닌 영체로 나타나신다면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림받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틀림없이 성육신으로 다시 오시고 또한 말세의 심판 사역을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왜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사역을 하실까요?”라고 묻습니다. 사실, 주님이 하시는 심판 사역은 이긴 자들을 온전케 하고 성도들을 맞이하는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왜 말세에 심판 사역을 하시는지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보겠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말세에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제일 많은데 적어도 200곳이 넘고 주께서 성육신하셔서 심판 사역을 하신다는 구절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사 2:4)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 98:9)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계 14:7)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행 17:31)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 5:27)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2)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 12:48)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벧전 4:17) 등등 이런 구절에서 분명하게 보다시피 하나님은 말세에 반드시 성육신으로 오셔서 심판 사역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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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6천년 경륜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고, 하나님나라의 문은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찾는 모든 이를 향해 열려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너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자취를 찾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나타남은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일인가! 하나님의 자취는 또 얼마나 찾기 어려운가! 이러한 시대,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타나는 날을 볼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이는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문제다. 아마 너희들은 이 문제에 관해 수차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하나님의 자취는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그 답을 찾았는가? 아마 많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며, 하나님의 자취는 바로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는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틀에 박힌 대답이야 누구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무엇을 하나님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고, 또 무엇을 하나님의 자취라고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와 사역하는 것을 뜻한다. 즉, 그만의 신분으로, 그만의 성품으로, 그리고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사람들 가운데에 강림하여 시대를 열고 시대를 끝내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떠한 의식도, 징조도 아니요, 한 폭의 그림이나 이적, 큰 이상(異象)도 아니며, 종교적 과정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나타남은 누구나 만질 수 있고 목격할 수 있는 실제 사실이다.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은 과정을 거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단기간의 사역을 위한 것도 아니며, 그의 경륜의 한 단계 사역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은 다 의의가 있고, 그의 경륜과 관계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타나는 것’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고 이끌고 깨우칠 때 ‘나타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매번 나타날 때마다 큰 사역을 하는데, 그 사역은 그 어떤 시대에 했던 사역과도 다르다. 그것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체험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열고 기존의 시대를 끝내는 사역이며, 인류를 구원하는, 더 새롭고 높은 한 단계의 사역이자 인류를 새 시대로 인도하는 사역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의 의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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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구세주의 강림을 보기를 소망했다. 구주 예수가 수천 년 동안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 왔던 사람들 가운데 흰 구름을 타고 친히 강림하는 것을 보기를 소망해 온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구세주가 돌아와 자신들과 재회하기를 소망했다. 바로 수천 년 전에 사람들을 떠난 구주 예수가 다시 돌아와 유대인 가운데서 했던 구속 사역을 또 행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며, 사람의 죄를 사해 주고 대신 짊어지며, 심지어 사람의 모든 과오를 대신 짊어지고 죄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구주 예수가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친절하며 존경스러운 구세주가 되어 사람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책망하지도 않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대신 짊어지며 심지어 사람을 위해 예전처럼 십자가에서 죽기를 소망했다. 예수가 떠난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물론,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들까지 그를 그렇게 간절히 그리워하고 그의 강림을 고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은혜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구주 예수가 말세의 기쁨이 넘치는 어느 날에 흰 구름을 타고 사람들 가운데 임하여 만인에게 나타나기를 소망했다. 물론, 이 또한 오늘날에 구주 예수의 이름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소망하는 바이다. 온 우주에서 구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홀연히 강림하여 그가 세상에 있을 때 했던 “나는 떠난 그대로 다시 돌아오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후 흰 구름을 타고 하늘 위의 지극히 높으신 이의 우편으로 돌아간 것처럼, 여전히 유대인의 모습을 하고 유대인의 옷을 입은 채 흰 구름(예수가 하늘로 돌아갈 때 탄 흰 구름)을 타고 수천 년간 그를 애타게 기다려 온 인류 가운데 강림할 것이라고 여긴다. 또 그들에게 나타나 양식을 베풀어 주고 생수가 솟게 하며, 은혜와 자비로 충만한 예수가 사람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생활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고정 관념이다. 하지만 구주 예수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의 관념과 완전히 상반되게 하였다. 그는 자신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강림하지 않았고, 흰 구름을 타고 만인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가 이미 강림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강림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만 있다. 사실 그는 이미 ‘흰 구름’(그의 영과 그의 말씀, 그리고 그의 모든 성품과 속성을 뜻하는 흰 구름)을 타고 말세에 온전케 하려는 이기는 자들 가운데 강림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비로 가득한 거룩한 구주 예수라 하더라도, 더럽기 그지없고 더러운 귀신들이 떼를 지어 사는 그런 ‘성전’ 안에서는 사역할 수 없음을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사람들이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가 어찌 또 불의한 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불의한 자의 옷을 입고 또 그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를 모르고 계속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내려는 그런 자들 앞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구주 예수가 자비와 긍휼로 충만하고 구원으로 가득한 속죄 제물이라는 것만 알 뿐, 공의와 위엄, 진노, 심판을 가득 지닌, 권능이 있는 존엄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구속주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간절히 바라며 심지어 사람의 기도가 ‘하늘’을 감동시켰을지라도, 구주 예수는 자신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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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기 힘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이 아닌 사람의 참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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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계산서 이야기에서 깨우침을 얻다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며 힘들게 사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다 보답한단 말인가
우리가 가져야 할 이성과 추구

샬롬!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주 안에서 평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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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안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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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언급할 중점이다. 욥이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다. 그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했느냐?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태도였다. 이 ‘찬송’에는 조건도 배경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여기서 욥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주관하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결심하고 계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숨김없이 다 열어 놓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무엇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면 무언가 얻을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뭘 얻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던 이유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복을 받거나 화를 당한 것으로 인해 그렇게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은 변함없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이 화를 입는 것 역시 하나님의 주재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큰 능력과 권능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배치한다. 사람에게 수시로 임하는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의 발현이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간에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욥이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다. 욥의 이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그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그것을 중히 여겼으며, 욥의 그러한 인식을 귀하게 여기고 그러한 마음도 귀하게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 임하는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욥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배치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직면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욥이 생각하는 자신의 책임이자,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거나, 무엇을 명령하거나, 무엇을 가르쳐 주거나, 무엇을 알려 주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말로 하자면, 그에게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그 어떤 깨우침이나 인도, 공급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고 하나님을 그런 태도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욥의 그러한 행동은 아주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고,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는 말씀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이론만 떠들어 대며 큰소리치고, 번제만 중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도 없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도 않는 사람들보다는 욥의 마음이나 사람됨이 하나님에겐 훨씬 소중했다. 욥은 마음이 순결하고 하나님께 숨기지 않았고, 그의 인성은 정직하고 선했으며, 또한 정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성을 갖추고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길을 좇아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권능과 큰 능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 그가 화복을 따지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므로 사람이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무지하며 이성이 없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태도이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욥의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지금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이 너희보다 더 많으냐? 하나님이 그 당시에 행한 사역과 말씀은 매우 적었으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욥이 그러한 성과를 이룬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 그러한 태도를 갖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는 지금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하나님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가 세상에 없다고 말씀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이미 그에 대해 이러한 평가와 결론을 내렸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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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처음의 시련에서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그리고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이 그의 소유를 거두어 간 것에도 순종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감사와 찬양까지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이 욥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보여 준 것이며, 또한 욥이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에서 증거한 것이다. 두 번째의 시련에서 사탄은 손을 뻗어 욥에게 갖은 해를 가했다. 욥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그의 증거는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의 강인함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증거한 것 역시 또 한 번 하나님께 인정받고 열납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욥은 자신의 실제 행동을 통해 사탄에게 선포했다. 육체의 고통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순종을 변하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심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죽음에 이르렀어도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욥의 의연함을 본 사탄은 겁이 났다. 욥의 믿음으로 사탄은 두렵고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사탄과 사생결단하겠다는 욥의 기세를 보고 침통해졌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사탄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서 사탄은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사망을 이겨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욥은 그 두 차례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섰으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실제로 나타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의 생존 법칙의 범위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욥은 인생에 더욱 풍부한 경험이 생겼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 성숙해지고 원숙해졌으며, 더 강인해지고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자신이 지키고 있는 순전함의 정확성과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으로 욥은 사람을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욥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이 더 추가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에 욥은 천 리 밖으로 밀려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 욥은 육체의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끼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런 모습은 욥이 일찍이 계획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욥의 그 ‘자연스러운 발현’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자신을 미워했고,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의 욥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데서 헤아리고 사랑하는 경지로 자신을 승화시켰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순종과 경외심을 헤아림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상처 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슬퍼하거나 상심하는 것은 물론, 괴로워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눈에 욥은 여전히 변함없는 욥이었지만, 그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하나님은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때의 욥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 눈에 명실공히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사탄을 이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섰으며, 자신을 더 온전하게 했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켰으며, 사탄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받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사람의 첫 사례가 되었다. 욥은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에게 참소당하고 시험당했으며,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의 손에 넘겨졌고, 또한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쳤으며 굳게 섰다. 그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지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빛 속에서 살고, 사탄의 감시와 해가 없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로워졌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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