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前分類:매일-말씀-묵상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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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구속시대 사역의 실상>(발췌문 22)

 

예수의 사역은 그 시대 사람들의 필요에 맞춰 이루어졌다. 그는 그의 사역에 따라 인류를 구속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 주기 위해 겸손, 인내, 사랑, 경건함, 포용, 긍휼 그리고 자비의 성품을 가져왔으며,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 그리고 온갖 누릴 것들을 베풀어 주었다. 사람이 누리는 모든 것은 평안과 희락이었고, 예수의 관용과 사랑이었으며, 그의 긍휼과 자비였다. 당시 사람은 구주 예수를 의지한 덕분에 수없이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누렸고, 평안한 마음과 영적인 위로를 얻었다. 그들이 그런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관련이 있다. 은혜시대에 사람은 이미 사탄에 의해 타락해(직역: 패괴돼) 있었다. 온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행하고 그 성과를 내려면, 반드시 풍성한 은혜와 한없는 포용, 인내, 나아가 사람의 죄를 충분히 사해 줄 수 있는 속죄 제물이 있어야 했다. 은혜시대의 사람은 죄를 사해 주는 속죄 제물, 즉 예수만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포용한다는 것만 알았으며, 그들이 본 것 또한 예수의 긍휼과 자비뿐이었다. 이는 다 그들이 은혜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속되기 전에 반드시 예수가 베풀어 주는 수많은 은혜를 누려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은혜를 누림으로써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예수가 베풀어 준 포용과 인내를 누림으로써 속죄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예수의 포용과 인내 덕분에 사람은 죄 사함 받을 자격을 얻었고, 그가 베풀어 준 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예수가 ‘의인을 구속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속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러 온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성육신한 예수가 심판과 저주의 성품을 지니고 와서 사람이 범하는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영원히 구속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영원히 죄에 속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6천년 경륜은 율법시대에서 정지되고, 그 상태로 6천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람의 죄는 갈수록 많아지고 깊어졌을 것이고 따라서 인류를 창조한 의의도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은 율법하에서만 여호와를 섬기게 되지만 인류의 죄는 최초로 지음 받은 인류의 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예수가 인류를 사랑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 줄수록, 사람에게 충만한 긍휼과 자비를 가져다줄수록, 사람은 예수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더 생기고, 예수가 비싼 값을 들여 사 온 길 잃은 양이라 일컬어지게 된다. 반면 사탄은 그 사역에 끼어들 수 없다. 예수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품속의 갓난아기를 대하듯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대했기에, 노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예수는 그들 가운데서 진노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들의 우매함과 무지함을 보지 않고 그들의 죄를 포용해 주었고 나아가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그의 마음으로 감화시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의 포용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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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알 수 있다>(발췌문 88)

 

사람은 전통 관념에 근거해 하나님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고, 사람의 연약함을 체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기는 하나, 너무 단편적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주요 방식이 아니다. 병에 걸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그 병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베푼 은혜이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은혜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수를 믿을 때 진리를 몰랐던 관계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매우 많이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게 했고, 사람을 오늘날까지 인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내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교회 건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봉사자’ 단계의 사역을 하여 사람을 무저갱 속으로 빠뜨렸다. 봉사자 그 당시의 말씀은 모두 저주의 말이었다. 너의 육을 저주하고, 네가 가지고 있는 사탄의 패괴 성품을 저주했으며, 너에게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저주했다. 그 단계 사역에서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위엄이었다. 곧이어 하나님은 또 형벌 사역을 했고, 죽음의 시련을 주었다. 사람은 그러한 사역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 심판과 형벌을 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긍휼도 보았다.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과 나타내는 성품은 전부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는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사람의 분량에 따라 사람에게 공급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올 수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본래 모습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의 분량에 맞춰 조금씩 사람에게 공급해 주어 그에 대한 인식이 사람 내면에 점차 생겨나게 했다. 사람은 오늘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심판이 더없이 좋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봉사자 단계의 사역은 하나님이 창세 이래 행한 첫 번째 저주 사역으로, 사람을 저주하여 무저갱 속에 넣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통해 비로소 정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접할 수 있었다. 사람은 모두 봉사자의 시련을 통해 드러났고, 자신의 충성심이 형편없고, 분량이 너무도 보잘것없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하나님을 흡족게 하겠다는 것은 말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봉사자 단계 사역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저주했지만, 이 시점에서 돌아보면 하나님의 그 단계 사역이 몹시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사람의 생명 성품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봉사자 단계 전에 사람은 생명 추구는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지혜롭게 사역한다는 것을 몰랐으며,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 시련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봉사자 단계의 사역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지극히 기묘하여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으며, 사람의 머리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는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사람의 분량이 몹시 보잘것없고, 사람의 패역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한 것은 한 가지 성과를 얻기 위함이었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사람을 저주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말씀의 저주였을 뿐, 사실이 임한 적은 없었다. 하나님이 저주한 것은 사람의 패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저주의 말씀 역시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도, 저주도 전부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 내면의 깨끗하지 않은 것들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연단을 주었고, 사람 내면의 부족한 것들은 그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온전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행한 각 단계의 사역은 엄한 말씀이든 심판과 형벌이든 할 것 없이 전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며, 너무나도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은 만세와 만대에 이런 사역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너희에게 이런 사역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한 것이다. 너희는 내적으로 고통을 조금 겪었지만, 늘 마음이 든든하고 평안을 얻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너희의 행복이다. 나중에 무엇을 얻게 되든 어쨌든 오늘날 하나님이 너희에게 행한 사역이 전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연단을 겪지 않아 늘 겉으로만 행하고, 겉으로만 열성적일 뿐, 성품이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현재 사람의 내면에는 여전히 방자하고 오만한 것들이 많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성품이 많이 안정되었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는 것 역시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 당시에는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언젠가 네 성품이 변화했을 때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행한 사역이 지극히 지혜로웠다고 느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현재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은 거짓말이다. 그가 지금까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인지, 저주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가 지금은 밝히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 너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 날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실로 의미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너는 인생을 알고, 너의 육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며, 영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물론, 삶이 기쁨으로 충만해져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오늘날의 하나님 사역이 엄청난 가치가 있음을 진실로 깨닫게 될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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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말씀이 모든 것을 이룬다>(발췌문 37)

 

하나님은 전 우주 아래에서 사역을 행한다.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먹고 마셔야 한다. 하나님이 행하는 이적과 기사를 보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해 왔다. 그러니 항상 마음을 이적과 기사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구약 율법시대에 일부 말씀을 했고, 은혜시대에는 또 예수가 많은 말씀을 했다. 그 뒤에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예수가 정한 율법과 계명에 따라 사람들에게 실행하게 했으며, 그가 말한 원칙들에 따라 체험하게 했다. 말세에 하나님은 주로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지, 이적과 기사로 사람을 억압하여 믿게 하거나 복종하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없다. 이적과 기사만 행한다면 하나님의 실제를 나타낼 수 없고 사람을 온전케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양육하고 목양한 뒤 사람이 순순히 순종케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것이 사역하고 말씀하는 목적이다.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다양한 사역 방식으로 온전케 한다. 말씀으로 연단하든, 책망하고 훈계하든, 공급하든, 여러 가지 다른 관점의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과 지혜, 기묘함에 대해 더 많이 알게 한다. 말세에 하나님이 시대를 끝내려 할 때 사람이 온전케 되면 그때 사람은 이적과 기사를 볼 자격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순종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너는 이적과 기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의 너는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 어떠한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의 너는 타락한 사람이므로 아직 순순히 순종하지 못한다. 그런 네가 이적과 기사를 볼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행할 때는 사람을 벌할 때이고, 세상을 바꿀 때이며, 시대를 끝낼 때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때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지 않는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 원칙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목적도 아니다. 사람들이 다 이적과 기사를 보고, 하나님의 영체까지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면, 사람들이 다 ‘믿지’ 않겠느냐? 동방에서 얻는 한 무리의 이긴 자들은 대환난 속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이전에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 얻어진 이 사람들은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온갖 연단을 겪고 나서야 진정으로 순종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막연하지 않고 실제적이다. 이들은 어떤 이적이나 기사도, 어떤 이적도 본 적이 없으며, 대단한 도리나 이치를 말할 수도 없고, 고매한 깨달음을 말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실제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하나님의 실제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더 분명히 나타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말세에 하는 사역은 실제적인 사역이다. 예수의 시대에 그는 사람을 온전케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인류를 속량하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했다. 그가 온 목적은 주로 십자가 사역을 이루는 것이었으므로 이적을 행하는 것은 그의 직분 범주 내에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적과 기사들은 모두 사역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한 일이고 부가적인 것이었으므로 결코 시대 전체의 사역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구약 율법시대에도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는 것은 실제적인 사역이므로 그는 절대 이적과 기사를 행하지 않는다. 일단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 실제적인 사역을 교란하게 되므로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한다고 하고는 도리어 또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면, 사람이 진실로 믿는지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 안에는 종교적인 것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이 말세에 온 목적은 사람 내면의 모든 종교 관념과 초자연적인 것들을 없애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실제를 알게 하며,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지워 버리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지금 네가 실제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보배로운 것이다! 진리는 모든 것을 압도한다. 지금 너는 진리를 얼마나 갖추었느냐?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만 하면 그가 하나님이란 말이냐? 악령도 이적과 기사를 보일 수 있다. 그럼 그것들 역시 하나님이란 말이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구하고 생명을 추구해야지 이적과 기사를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어야 한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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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성육신의 비밀 4>(발췌문 33)

 

이 마지막 단계의 사역은 말씀으로 성과를 거두는 것이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수많은 비밀을 알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한 사역을 알게 된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깨우침을 얻고, 지금까지 사람이 풀지 못한 비밀을 알게 되며, 역대 선지자와 사도가 한 사역과 사역의 원칙을 알게 된다. 또 사람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었고, 사람의 거역과 대적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본질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과 모든 말씀을 통해 영의 사역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한 사역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성품도 알게 되었다. 네가 하나님의 6천 년 경영 사역을 알게 된 것도 역시 말씀을 통해서이다. 과거에 네게 어떤 관념이 있었는지 깨닫고 그것을 버리게 된 것 역시 말씀으로 인한 것 아니더냐? 예수의 사역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지만 이번 단계 사역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것 역시 말씀으로 인한 것 아니더냐?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한 말씀은 역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한 사역을 능가한다. 선지자가 한 예언일지라도 이런 성과를 거둘 수는 없다. 선지자가 한 말은 예언에 불과하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지, 당시 하나님이 하려고 했던 사역이 아니고, 사람의 생활을 이끌어 주는 것도 아니며, 또 사람에게 진리를 베푸는 것도 비밀을 풀어 주는 것도 아니고, 생명을 베풀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번 단계에서 한 말씀에는 예언도 있고 진리도 있지만, 그 말씀은 주로 사람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의 말씀은 선지자의 예언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번 단계의 사역은 예언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이고 사람의 생명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첫 단계 사역은 여호와의 사역이었다. 그가 한 사역은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해 주는 것이었고, 땅에 사역의 발원지를 마련하기 위한 시작 사역이었다. 당시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고 부모를 공경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몰랐고 땅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으므로 첫 단계 사역에서는 반드시 사람의 생활을 이끌어 주어야 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알려 준 것은 인류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고, 사람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이 많은 선지자를 일으켜 예언을 하게 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인도를 받아 예언을 했지만, 이는 그저 하나님 사역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첫 단계 사역에서는 말씀이 육신 되지 않았으므로 선지자를 통해 각 나라와 족속을 효유했다. 예수가 사역할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지는 않았다. 말세에 하는 이 단계의 말씀 사역은 역대에 행한 적이 없다. 비록 이사야, 다니엘, 요한이 많은 예언을 했지만, 그들이 한 예언은 지금 하는 말씀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말은 예언에 그쳤지만 지금 하는 말은 예언이 아니다. 내가 모든 말을 예언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너희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내가 한 말이 모두 내가 떠난 후에 일어날 일이라면, 네가 어찌 알 수 있겠느냐? 말씀 사역은 예수 시대에 한 적이 없고, 율법시대에도 한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역사하실 때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난날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시는 한편,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 말씀이지만 말씀에도 차이가 있다. 여호와가 한 말씀의 본질은 무엇이더냐? 그는 사람이 땅에서 생활하도록 이끌어 주었을 뿐, 그 말씀이 생명과 영적인 일에 관련되지는 않았다. 어째서 여호와가 말씀한 것을 각 지역에 효유했다고 하겠느냐? ‘효유’라는 두 글자는 분명히 알리고 직접 지시한다는 뜻이다. 여호와는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 그를 경외해야 하는지 직접 가르쳤을 뿐, 비유 같은 것도 없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은 사람을 책망하거나 징계한 것이 아니었고 심판하거나 형벌한 것도 아니었다. 여호와는 그저 인도하기만 했다. 여호와는 모세를 시켜 그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라고 일러 주면서 날마다 해 뜨기 전에 주워 담으라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까지 두면 썩어 버리니 그날 먹을 양만 넉넉히 거두라고 했다. 여호와는 사람을 꾸짖거나 사람의 본성을 들추어내지 않았고, 사람 내면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여호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을 이끌어 주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 단순히 기계적인 행동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는 율법을 반포해 백성들을 이끌어 주기만 한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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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온전케 된 사람만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발췌문 89)

 

지금 하고 있는 사역은 사람이 사탄을 저버리고 조상을 저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의 심판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들추어내고 사람에게 인생의 본질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 차례 또 한 차례 계속되는 심판이 사람의 마음을 찌른다. 모든 심판은 사람의 운명에 직접 관련된 것으로, 의도적으로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하여 사람이 그런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인생과 이 더러운 세상에 대해 알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을 알게 되며, 사탄이 패괴시킨 인류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이렇게 형벌하고 심판할수록 사람의 마음을 더 아프게 찌를 수 있고, 사람의 영을 불러 깨울 수도 있다. 이런 심판의 목적은 아주 깊이 패괴되고 가장 심하게 속은 사람의 마음과 영을 깨우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영이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의 영이 이미 오래전에 죽어 하늘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있는 줄도 모르며, 더욱이 자신이 죽음의 나락에서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자신이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자신의 썩은 시체가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 죽음의 음부에 떨어진 존재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지상 만물이 이미 인류에 의해 파괴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오늘날, 창조주가 땅에 와서 구원 가능한 패괴된 사람들을 찾고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온갖 연단과 심판을 겪었지만 사람은 시종일관 무감각하여 거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사람은 너무도 타락하였다! 이러한 심판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자비한 우박과도 같겠지만 사람에게는 가장 이로운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심판하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고 고해의 심연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이렇게 사역하지 않으면 사람을 음부에서 건져 내기 힘들다. 사람의 마음이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사람의 영이 사탄에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극도로 타락한 너희들을 구원하려면 온 힘을 다해 불러 깨우고 심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차디찬 너희의 마음을 깨울 수 있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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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사역과 진입 4>(발췌문 191)

 

하나님은 중화 대륙, 즉 홍콩이나 대만 동포가 말하는 내륙에 성육신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에 왔을 때, 하늘 위아래의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는 하나님이 은밀히 재림한 참뜻이기 때문이다. 그가 육신으로 와서 오랫동안 사역하고 생활했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아는 이가 없다. 어쩌면 이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이번에 육신으로 왔다는 것을 사람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영이 얼마나 대단한 기세로 역사하든 하나님은 시종일관 내색하지 않으며,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이 단계의 사역은 천계(天界)에서의 사역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눈으로 보았지만, 알지는 못한다. 하나님이 이 단계의 사역을 끝내면 모든 사람은 긴 꿈에서 깨어나 태도가 일변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번에 육신으로 온 것은 호랑이 굴에 떨어진 것과 같다.”라고 말씀한 바 있다. 즉, 하나님은 이번 사역을 육신으로 행하고, 그것도 큰 붉은 용이 군거하는 곳에 강생하여 행하기 때문에 더욱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땅에 온 것이다. 하나님이 직면한 것은 총칼과 몽둥이요, 시험이요, 살기등등한 사람들이므로, 언제든 죽임 당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진노를 지니고 왔다. 그러나 그가 온 이유는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이다. 즉, 구속 사역에 이어 두 번째 부분의 사역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 단계의 사역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천방백계로 시험의 공격을 피하며 자신을 낮추고 감추었지, 한 번도 자신의 신분을 과시한 적이 없다. 예수가 사람을 십자가에서 구원한 것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일 뿐, 온전케 하는 사역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렇게 하나님의 사역이 반만 완성되었다. 구속 사역을 끝낸 것은 전체 계획의 절반에 불과했다. 새 시대가 시작되고 옛 시대가 지나가려 할 때, 아버지 하나님은 두 번째 부분의 사역을 깊이 생각하고, 두 번째 부분의 사역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과거에는 말세에 성육신할 것이라고 명확히 예언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 더 은밀하게 육신으로 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만인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동틀 무렵에 땅에 와 육신에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순간이 도래했음을 모른다. 어쩌면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수도 있고, 많은 이가 깨어 기다릴 수도 있으며, 수많은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드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중에 하나님이 이미 땅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역하는 이유는 더 순조롭게 사역을 펼치고, 보다 나은 사역의 성과를 거두며, 더 이상의 시험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봄잠에서 깨어나는 동틀 녘에 하나님의 사역은 이미 끝났을 것이며, 하나님은 땅을 떠남으로써 땅에서 떠돌며 기거했던 생애를 마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 친히 행하고 친히 말해야지, 사람이 끼어들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극심한 고통을 감수하고 땅에 와 친히 사역을 행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은혜시대의 수천 배에 달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큰 붉은 용이 군거하는 곳에 내려와 자신의 사역을 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빈궁한 백성, 거름 더미 속의 사람을 구원(원문: 救贖)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고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크나큰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극악무도한데 어찌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이 때문에 하나님이 땅에 와서 늘 묵묵히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잔혹하게 굴어도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하늘의 아버지가 맡긴 더 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사역만 할 뿐이다. 너희 중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깨달은 자가 있더냐?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의 부담을 아들보다 더 잘 헤아릴 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영은 항상 걱정하고, 땅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늘 간구하며 애태우는데, 어느 누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아들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늘과 땅으로 갈라져 있는 것은 선택할 수 없는 일이어서 항상 멀리서 마주하며, 영 안에서 함께한다. 인류야! 언제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것이냐? 언제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것이냐? 아버지와 아들은 본래 서로를 의지하거늘, 이들을 하늘 위아래로 갈라놓아야만 하겠느냐?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듯 아버지도 아들을 그리워하거늘, 왜 하염없이 기다리고 고대해야만 한단 말이냐? 떨어져 지낸 세월이 길지는 않으나 수많은 낮과 밤을 기다리며 사랑하는 아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애타게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 그는 지켜보며,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랑하는 아들의 빠른 귀환을 위한 것이건만, 세상 끝과 바다 끝을 떠돌고 있으니 언제쯤 재회할 수 있겠느냐? 상봉하는 날 영원히 함께할지라도 어찌 수천 번의 밤낮을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떨어져 지내겠느냐? 땅에서의 수십 년은 하늘에서의 수천 년과 같거늘 어찌 아버지 하나님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땅에 온 하나님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파에 시달린다. 하나님은 본래 죄가 없거늘 어찌 사람과 같은 고난을 겪게 하는 것이냐?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어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넘치도록 주었는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것은 적어도 너무나 적으니 어찌 하나님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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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정복 사역의 실상 3>(발췌문 291)

 

오늘날 너를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자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며, 나아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자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인 동시에 애굽 사람의 하나님이고, 영국 사람의 하나님인 동시에 미국 사람의 하나님이다. 그는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의 하나님이며, 하늘에 있는 만물의 하나님인 동시에 땅에 있는 만물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족속이든, 이방의 모든 족속이든 모두 한 분의 하나님 손에 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수천 년 동안 사역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유대 땅에 태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또 큰 붉은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중국 땅에 강림했다. 그가 유대에서 태어났을 때는 유대인의 왕이었지만, 지금은 너희 가운데 강림했으니 너희의 하나님 아니겠느냐?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인도했었고, 유대 땅에 태어났었으며, 다시 또 이방에 태어났지만, 그가 행한 모든 사역은 그가 만든 인류 전체를 위한 것 아니겠느냐? 그가 이스라엘 사람은 백배로 좋아하고 이방인은 천배로 미워하겠느냐? 이것은 모두 너희의 고정 관념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피조물 중에 누가 전능자의 손에 있지 않더냐? 오늘날 너희를 정복하는 것도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냐? 너희가 아직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만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의 다윗 집안만이 하나님의 출생지가 될 수 있다고,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어느 민족도 하나님을 ‘탄생시킬’ 자격이 없으며, 더욱이 어떤 이방 민족도 여호와의 사역을 직접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완고한 자가 된 것 아니겠느냐? 계속 이스라엘만 주시하지 마라. 지금 하나님이 바로 너희 가운데 있으니 계속 하늘만 쳐다보지도 말고, 더 이상 하늘에 있는 너의 하나님을 그리워하지도 마라!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왔는데 어떻게 하늘에 있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은 시간은 길지 않지만, 너의 관념은 적지 않다. 그리하여 너는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왕림’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더욱이 이렇게 더럽기 그지없는 너희가 친히 나타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이 이방에 친히 강림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는 시내산이나 감람산에 강림하여 이스라엘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고, 이방인(이스라엘 외의 사람)은 모두 그가 미워하는 대상이므로 친히 그들에게 사역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오래전부터 너희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던 관념이다. 오늘날 너희를 정복하는 것은 너희의 이런 관념을 깨뜨리기 위함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친히 나타난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시내산도 아니고 감람산도 아닌, 과거에 인도한 적 없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두 단계 사역을 한 후에 이스라엘 사람과 모든 이방인에게는 이런 관념이 생겼다. 즉,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오직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할 뿐,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은 너희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 즉 우리의 하나님은 너희를 미워하신다.’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우리 유대인의 모습을 지니고 유대인의 특징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에서 사역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형상과 비슷하며, 우리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다. 예수님은 우리 유대인의 왕으로, 이방인은 이렇게 큰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 유대인의 속죄 제물이시다.’라고 생각한다. 그저 두 단계 사역을 했을 뿐인데 이스라엘 사람과 유대 족속에게는 이처럼 많은 관념이 생겼다. 그들은 하나님을 독점하고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방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치 않고, 그의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과 유대인들, 특히 자신을 따른 제자들만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여호와가 행한 사역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한 것임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지금 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난 너희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 오늘날 하나님이 바로 너희들 가운데 있지 않더냐? 설마 이것이 꿈이란 말이냐? 너희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이 바로 너희 가운데 있지 않더냐? 너희는 아직도 이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이제부터 정복된 사람과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선민 아니겠느냐? 지금 따르고 있는 너희가 바로 이스라엘 이외의 선민 아니겠느냐? 너희의 신분도 이스라엘 사람의 신분과 같아지지 않았느냐? 이 모든 것은 너희가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너희를 정복하는 것도 이러한 목적을 위한 사역 아니겠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원히 너희의 하나님이 된다. 너희가 모두 그를 따르고 그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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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성품이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발췌문 303)

 

사람이 하나님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정이 있어서도, 사람이 얻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아서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에게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가 있더냐? 이성이 건전하고 양심이 예민한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가 있더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긴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불사름 당한 이가 있더냐?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한 사람 중에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집 밖으로 쫓겨난 이가 있더냐? 하나님을 한없이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징벌 속에서 살게 된 이가 있더냐?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린 사람 중에 빈털터리가 된 이가 있더냐?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재물을 쓰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해 자기 일생의 정력을 쓰려고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사람의 생각에 맞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너희 같은 이런 인성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도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 너희는 자신이 인류 중의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인성이 가장 비천하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존칭’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너희를 늑대의 아비나 어미, 늑대의 자식이나 손자, 늑대의 후예, 늑대의 민족이라고 한다. 너희는 자기 신분을 알고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하며, 스스로를 상등 인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인류 가운데 가장 악랄한 한 무리의 비인류이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모른단 말이냐? 내가 너희들 가운데서 사역하면서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너희의 이성이 정상을 되찾지 못하고, 너희의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늑대’라는 호칭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고, 저주와 징벌의 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너희는 출생이 비천하고, 본래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본래 한 무리 굶주린 늑대이고, 한 무더기 잡동사니나 쓰레기다. 내가 너희에게 사역하는 것은 너희처럼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계속 이렇게 거역한다면 나는 나의 사역을 그만둘 것이며, 앞으로 다시는 너희에게 사역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무리의 사람들에게 옮겨 가서 사역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영원히 너희를 떠나게 된다. 나는 나와 적이 되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의 마음에 합하길 원하느냐, 아니면 나와 적이 되길 원하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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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발췌문 355)

 

인류에게 사회 과학이 생긴 이래, 과학과 지식은 인류의 마음을 차지했으며, 나아가 인류를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과 유리한 여건을 잃게 되었고, 인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점점 사라졌다.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인류의 내적 세계는 어둡고 절망적이며 공허하다. 뒤이어 사회 과학자, 역사학자, 정치가들이 일어나 사회 과학론, 인류 진화론 등을 발표하여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다는 진리에 어긋나는 관점을 인류의 머리와 마음에 채워 넣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만유 창조를 믿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반대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또한 갈수록 많은 사람이 하나님 사역의 기록과 구약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신화나 전설로 대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존엄과 위대함은 희미해졌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믿음도 아득해졌다. 사람은 더 이상 인류의 존망이나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인류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공허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오늘날 어디에서 사역하는지, 인류의 종착지를 어떻게 주재하고 계획하는지를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느덧 인류의 문명은 이렇게 기대와 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오히려 죽은 사람이 더 행복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지난날 문명이 발전했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조차 이런 원망을 품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기에 통치자나 사회학자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 누구도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없으므로 인류 마음속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하고, 어떤 사회적 담론도 공허의 질곡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 과학, 지식, 자유, 민주, 즐김, 안락으로 사람이 얻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위안에 불과하다. 인류는 이런 것들이 있어도 불가피하게 계속 죄를 짓고, 사회의 불공평을 원망한다. 또한 이런 것들이 있어도 인류의 탐구하려는 갈망과 욕망이 멈추지는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기에, 인류의 무의미한 희생과 탐구는 사람에게 점점 더 많은 고뇌를 안겨 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불안에 떨며 인류의 미래와 앞길을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과학과 지식을 두려워하고, 공허함을 더욱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네가 이 세상의 자유 국가에 있든, 인권이 없는 국가에 있든 너는 인류의 운명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네가 통치자이든, 통치를 받는 자이든 너는 인류의 운명, 비밀, 종착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떨쳐 버릴 수 없고, 영문 모를 공허함을 떨쳐 버릴 수도 없다. 사회학자는 인류의 이러한 공통적 현상을 가리켜 사회 현상이라 말하지만, 나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인은 한 명도 없다. 결국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와 하나님의 생명은 어떤 사람도 대신하지 못한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정한 사회뿐만이 아니다.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 공급이 필요하다. 인류는 하나님의 생명 공급과 구원을 얻어야만 필요와 탐구욕, 그리고 심적 공허함을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이나 보살핌을 얻지 못하는 국가와 민족은 몰락과 흑암으로 나아갈 것이고, 종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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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발췌문 107)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비록 그가 육신에 거하고 있으나 그의 인성이 육에 속한 사람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한 성격이 있으며, 그 성격 역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에는 연약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연약함이란 그의 인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연약함은 신성을 어느 정도 제약하지만 무한정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와 기한이 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의 정상 생활 이외에도 인성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신성에 좌우된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하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직접적으로 신성에 지배되며, 그에게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이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고 사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종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그는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이 땅에 왔기에 피조물의 외형, 전에 없었던 인성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 이는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이요,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 자신임에도 그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육신의 위치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그의 어떠함이다.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어떠함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하나님을 거역할 리 없고,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리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보다도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을 갖고 있다. 그 권병은 신성이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어떠함이다. 그 성품과 어떠함으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무리 정상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든, 그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은 흔히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을 그리스도의 결점으로 간주한다. 그리스도가 아무리 신성의 어떠함을 나타내도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순종하고 자신을 낮출수록 어리석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더욱 경시한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멸시하면서 위대한 형상을 한 ‘위인’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숭배하기도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까닭은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인성에 가려져 있지 않고, 피조물의 입장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지 않으며, 비범한 인성을 지니고 있다면, 아마 누구도 그를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늘 하늘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는 인성도, 피조물의 속성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그리스도는 멸시하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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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사람의 삶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간다>(발췌문 128)

 

하나님이 땅에 와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하고, 친히 사람 앞에 나타나고 사람에게 보게 하는데, 이것이 작은 일이겠느냐? 이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에게 보게 하고 막연하거나 공허한 존재가 아니라 실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은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자신을 낮출 수도 있음을 알게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렇게 단순할 리 있겠느냐? 사탄이 패괴시킨 것은 사람의 육이고,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 또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육신을 입고 와서 사탄과 싸우고 친히 사람을 목양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역에 이롭다. 하나님은 두 번 성육신했는데, 그 두 차례 입은 육신은 모두 사탄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자 사람을 더 잘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사탄과 싸우는 대상은 하나님의 영이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든, 어쨌든 하나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천사는 사탄과 싸울 수 없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은 더더욱 사탄과 싸울 수 없다. 천사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으며, 사람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을 만들고 인간 세상에 임하여 사람을 구원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직접 성육신해야 한다. 즉, 육신을 입고, 그의 원래 신분을 지니고 그가 해야 할 사역을 가지고 사람들 가운데 와서 친히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사역하거나 사람이 사역한다면 이 싸움은 영원히 성과를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끝을 맺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 와서 친히 사탄과 싸워야 사람이 구원받을 기회를 얻게 되며, 사탄도 수치를 당하고 더 이상 틈탈 기회나 수작 부릴 방법이 없게 된다.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모두 하나님의 영이 할 수 없는 것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더더욱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하는 사역은 모두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이며,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싸움에 ‘참여’한다면 그저 참패하여 낭패를 당할 뿐, 사람의 패괴 성품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을 십자가에서 구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패역한 인류를 정복할 수도 없다. 그저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낡은 사역을 하거나 사탄을 물리치는 것과 관련 없는 사역을 조금 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헛수고를 하겠느냐? 사람을 얻지 못하고, 사탄을 물리치는 사역은 더더욱 할 수 없다면 그 사역에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사탄과의 싸움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할 수 있으며,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분은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천지개벽의 사역을 할 수 없고, 사탄과 싸우는 사역은 더더욱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에서 창조주를 만족게 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때마다, 즉 새 시대의 사역이 시작될 때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그 사역을 행하며, 이를 통해 시대 전체를 이끌고 온 인류를 위해 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시대가 새롭게 바뀔 때마다 사탄과의 싸움이 새로 시작되며, 이로써 인류도 더 새롭고 아름다운 경지, 하나님이 친히 이끄는 새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지만,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은 모든 싸움이 끝난 후의 열매이기도 하다. 사탄은 만물을 부패시킨 존재이고, 모든 싸움의 패장이자 싸움이 끝난 후에 벌을 받는 대상이다. 하나님, 사람, 사탄, 이 셋 중에서 오직 사탄만이 버림받을 대상이지만, 사탄에게 얻어져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징벌받는 대상이 된다. 앞서 말한 셋 중에서 만물의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한편, 사탄에 의해 패괴되었다가 하나님께 되찾아진 뒤 하나님의 도를 행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 악한 자를 심판하는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고 사탄은 반드시 패배하겠지만, 사람은 이기는 자도 있고 실패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이긴 자에 속하고, 패배하는 사람은 패배자에 속한다. 이것이 바로 각기 부류대로 나뉘는 것으로, 모든 사역의 종결이자 근본 취지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다. 경륜의 주된 핵심은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주된 이유도 이 핵심과 이 사역을 위함이고, 사탄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첫 번째 성육신도 사탄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하나님은 친히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첫 번째 싸움의 사역, 즉 인류를 속량하는 사역을 완성했다. 마찬가지로 이번 단계도 하나님이 친히 사역한다.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고 친히 말씀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다른 사역도 곁들여 하겠지만, 그가 친히 이 사역을 하는 주목적은 역시 사탄을 물리치고, 모든 인류를 정복하여 얻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의 이 사역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만약 그가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감춘다는 것을, 하나님이 바로 실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만 사역을 한다면 성육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지 않아도 그의 낮춤과 감춤, 위대함과 거룩함을 사람에게 직접 계시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인류를 경영하는 사역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사람을 구원하거나 온전케 하지 못하며, 더욱이 사탄을 물리치지도 못한다. 단순히 영과 영의 싸움으로 사탄을 물리치는 사역은 실질적인 가치가 전혀 없으며, 사람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의 운명과 미래를 그르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이 이렇게 사역하는 것은 깊은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그저 사람에게 보여 주거나 사람의 시야를 넓혀 감동과 격려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어떤 의의도 없다. 네가 이런 인식밖에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도 하나님이 성육신한 진정한 의의를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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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성육신 하나님과 쓰임 받는 사람의 본질적 차이>(발췌문 139)

 

성육신 하나님이 항상 사람과 함께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는 더 많은 사역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의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되며, 육신을 벗어나 그가 해야 할 사역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육신의 형상을 지니고 사역한다. 땅에 온 하나님은 정상인처럼 죽을 때의 모습이 되어야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사역이 끝나면 사람을 떠난다. 그에게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없다. 그는 사람의 나이 계산법에 따라 날짜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 단계에 따라 육신의 생명을 끝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육신으로 온 하나님은 어느 정도 성장해서 성인이 되고 나이가 차서 언젠가 육신이 말을 듣지 않을 때에야 떠날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사람의 상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 그는 육신으로 와서 그가 해야 할 사역만 하지, 정상인의 삶 그러니까 부모에게서 태어나 성인이 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세상의 풍파를 겪는 등 정상인의 갖가지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은 것이고, 육신에 임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상인의 생활을 하지는 않고, 그저 하나님 경륜의 한 부분을 완성한 후에 사람을 떠날 뿐이다. 그가 육신으로 왔지만 하나님의 영은 육신의 정상 인성을 온전케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예정한 시간에 신성으로 직접 사역하고,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하며, 그의 직분을 이행한다. 이것은 그의 육신의 수명과는 무관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이 단계 사역을 끝내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생명도 끝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신이 얼마나 유지될지, 땅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전부 영의 사역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사람이 생각하는 정상 인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예수는 육신에서 33년 반 동안 살았다. 육신의 수명만 보자면 죽을 수 없는 나이였고 떠나서도 안 됐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사역이 끝나자 육신도 거두어들이니, 육신은 영을 따라 사라진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에 있을 때 이러한 사역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서 성육신 하나님께는 정상 인성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땅에 온 이유는 정상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도, 정상인의 삶을 산 후에 사역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정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신성 사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어떤 뜻도, 혈기도 섞여 있지 않으며, 사회성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사람의 사유나 관념은 물론 처세 철학과도 관련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이자, 성육신의 실제 의의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온 주된 이유는 육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기 위해서이지, 다른 번잡한 과정은 없다. 그는 정상인의 체험을 갖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으로 해야 하는 사역에는 정상인의 체험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온 것은 육신이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며, 나머지는 그와 무관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번잡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그의 사역이 끝나면 그가 성육신한 의의도 따라서 없어지게 된다. 이 단계의 사역이 끝나면 그가 육신으로 해야 할 사역이 끝나고 육신의 직분은 전부 이행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육신에 거하며 사역할 수는 없다. 그가 다른 곳으로 가서 사역해야 하므로 그때는 육신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해야 그의 사역이 전면적으로 행해질 수 있고, 더 잘 전개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래의 계획에 따라 사역한다. 어떤 사역을 해야 하고, 어떤 사역을 끝냈는지, 그는 손금 보듯 훤하게 꿰뚫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가 예정한 길로 인도하므로 아무도 도망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영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어쩌면 이후의 사역에서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말씀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 있는 영이 사람의 삶을 인도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만지고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요구하는 실제에 더 잘 진입하여 실제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룰 사역이자, 그가 오래전부터 계획해 놓은 것이니, 너희는 여기에서 너희가 가야 할 길을 봐야 할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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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발췌문 159)

 

너희는 하나님 사역의 이상(異象)을 알고 기본 방향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적극적인 측면의 진입이다. 네가 이런 이상과 관련된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역이 어떻게 바뀌든 전반적으로 너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상이 분명해지며, 네가 진입하고자 하는 것과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도 목표가 생긴다면, 너의 체험과 인식은 더 깊어지고 더 구체적이 되며, 큰 방향을 알게 되어 네가 생명에 해를 입거나 헤매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이 한 단계 한 단계의 사역을 알지 못한다면, 각 단계의 사역에서 손해를 볼 수 있다. 사나흘이나 네댓새가 지나도 돌이키지 못하고, 열흘이나 보름이 지나도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일에 지장을 주지 않겠느냐? 너희는 적극적인 측면의 진입과 실행을 다방면적으로 잘 알아야 한다. 또한 사역 이상에도 너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바로 정복 사역의 의의, 앞으로 온전케 되는 길, 환난과 시련을 통해 이루려는 것, 그리고 심판과 형벌의 의의, 성령 역사의 원칙, 온전케 되는 것과 정복되는 것의 원칙이다. 이것은 모두 이상과 관련된 진리에 속한다. 이 밖에 율법시대와 은혜시대, 그리고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세 단계 사역이 있다. 또 이후의 증거에 관한 것도 있는데, 이것 역시 이상에 관련된 진리로, 무엇보다 기본적인 것이고 중요하다. 지금 너희에게는 진입하고 실행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게다가 그것들은 각각 절차와 세부적인 내용이 있다. 이런 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진입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인식이 너무 얄팍해서 기본적인 진리들도 실행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들도 처리하지 못한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성품이 패역한 데다 오늘날의 사역에 대한 인식 또한 너무 얄팍하고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전케 되기가 쉽지 않다. 네가 너무나 패역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며, 심지어 가장 분명한 진리마저 실행하지 못한다면, 너 같은 사람은 구제 불능으로, 정복되지 못한 자에 속한다. 너의 진입에 세부적 내용과 목표가 없다면 너의 성장은 느릴 것이고, 너의 진입에 조금도 실제가 없다면 너의 추구는 헛될 것이다. 또한, 진리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너에게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 성장과 성품 변화는 모두 실제에 진입함으로써 이룰 수 있고, 나아가 세부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진입하는 과정에서 세부적으로 많이 체험하고, 현실적으로 많이 깨닫고 진입한다면, 너의 성품은 빨리 변화할 것이다. 지금 너는 실행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명하게 알지 못할지라도, 사역 이상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상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너는 진입할 수가 없다. 반드시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그 후에 진입할 수 있다.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야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고 더 깊이 진입하게 된다. 너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야 한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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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성육신의 비밀 3>(발췌문 115)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사람에게 자신의 육신을 알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사람의 육체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분하도록 하기 위함도 아니며, 사람의 분별력을 훈련시키기 위함도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경배하게 함으로써 큰 영광을 얻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이 성육신한 본래 의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사람을 정죄하거나 일부러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려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다. 그의 성육신은 언제나 불가피한 일이다. 사람의 상상과 달리, 더 큰 사역과 더 큰 경영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땅에 온 것은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땅에서 돌아다니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가 해야 할 사역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가 이렇게 큰 중임을 짊어지고 이렇게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 사역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성육신은 부득이한 일로, 거기에는 모두 특별한 의의가 있다. 그저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시야를 넓혀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는 절대로 쉽게 인간 세상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땅에 온 것은 그의 경영과 그의 더 큰 사역을 위해서이고,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는 시대를 대변하고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 왔다. 그것도 육신을 입고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 왔으며, 더욱이 전 인류의 삶을 인도하기 위해서 왔다. 이 모든 것은 그의 경영, 그리고 전 우주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하나님이 오직 사람에게 자신의 육신을 알게 하고 시야를 넓혀 주기 위한 목적으로만 성육신했다면 어째서 세계를 일주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아주 쉬운 일 아니겠느냐?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합당한 곳을 택해 머무르며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시작했다. 이 육신은 매우 큰 의의가 있다. 그는 시대 전체를 대변하고 또 시대 전체의 사역을 전개했다. 그는 옛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었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경영과 관계되는 큰일이고, 하나님이 땅에 와서 행하는 한 단계 사역의 의의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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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성육신의 비밀 3>(발췌문 114)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오직 시대를 이끌고 새로운 사역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이다. 이는 사람의 기능과 크게 다르므로 양자를 같이 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사역을 하려면 오랜 시간 양성되고 온전케 된 후에야 쓰임 받을 수 있다. 또 매우 훌륭한 인성을 갖추고 정상 인성의 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처세의 원칙과 법칙을 많이 알고 사람의 지혜와 윤리 지식도 많이 배워야 한다. 이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갖출 필요가 없다. 그는 사람을 대표해 사역하거나 사람의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어떠함을 나타내고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기 때문이다(물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때 하며, 직분을 이행해야 할 때 사역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람의 생활이나 사람의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인성 안에는 이런 것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이런 것들을 갖추지 않아도 그의 사역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는 직분을 이행해야 할 때 자신의 직분을 이행할 뿐이며, 어떤 지위에 있든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이 해야 할 사역만 한다. 사람이 그를 어떻게 알고 있든,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그의 사역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예수가 사역할 때도 그가 대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오직 자신의 사역만을 해 나갔다. 그러한 것은 그가 해야 할 사역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는 처음에 사람들에게 자기 신분을 밝히거나 알리지 않고 그저 자신을 따르게만 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낮춤이었으며, 또한 육신으로 와서 사역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육안으로는 알 방도가 없었고, 설령 사람이 알아본다 해도 그의 사역을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성육신한 목적은 사람에게 그의 육신을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을 하고 그의 직분을 이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해야 할 사역이 다 끝나면 사람들은 저절로 그의 신분과 지위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무언가를 크게 알리지도 않고 묵묵히 지낸다. 사람들이 어떠하든, 그를 어떻게 따르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직분을 이행하며 자신이 해야 할 사역만 한다. 그의 사역은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다. 그가 사역을 끝낼 때가 되면, 사역은 반드시 끝나고 종결된다. 아무도 이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가 사역을 끝내고 떠난 뒤에야 그의 사역을 알게 되지만 그래도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그가 사역할 때의 뜻을 사람들이 완전히 알게 되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다시 말해, 성육신 하나님 시대의 사역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 부분은 성육신 하나님이 친히 사역하고 말씀하는 것이다. 육신의 직분이 끝나면 다른 한 부분은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에게 맡겨서 행하게 된다. 이때는 사람이 자신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미 길을 열어 주었으므로 사람 스스로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성육신 하나님이 일부 사역을 한 뒤에 성령과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이 그 사역을 이어서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단계 사역에서 성육신 하나님이 주로 하는 사역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성육신한 의의가 무엇이며, 그가 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하나님께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의 실수이자 사람의 관념이며, 더욱이 사람의 패역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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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네가 예수의 영체를 볼 때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꾼 후이다>(발췌문 287)

 

너희들의 충성은 입술에만 머물고, 너희들의 앎은 머릿속 관념에만 머물며, 너희들의 수고는 하늘나라의 복을 위한 것이다. 그럼 너희의 믿음은 또 어떠하냐? 지금까지도 너희는 이 진리들을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너희는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또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는지, 어떻게 성령 역사에 진입하는지,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미혹을 어떻게 분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 중 한 마디라도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정죄하기만 한다. 너의 겸손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순종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충성은 또 어디에 있느냐? 진리를 찾는 너의 태도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의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이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분명 멸망될 부류이며, 육신으로 돌아온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분명 지옥의 자손, 천사장의 후손, 영원히 멸망될 부류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예수를 따르는, 이른바 성도라고 하는 모든 이에게 말해 주겠다. 흰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예수를 너희 육안으로 직접 보게 될 때는 공의로운 해가 공개적으로 나타난 때이다. 그때 네 마음은 몹시 흥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알고 있느냐? 예수가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을 보게 될 때는 네가 지옥으로 떨어져 징벌을 받아야 할 때이고, 하나님의 경륜이 끝났다고 선고될 때이며, 하나님이 상선벌악(賞善罰惡)할 때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이적을 보기 전 진리만 선포되었을 때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이적을 좇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여 정결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와 창조주의 품속에 안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흰 구름을 탄 예수가 아니라면 거짓 그리스도이다’라는 신념을 고집하는 자들은 영원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이적을 행하는 예수만을 믿고,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고 생명의 참도를 전하는 예수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가 공개적으로 흰 구름을 타고 돌아올 때 그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너무나 완고하고 너무나 교만하며 자신을 과신하는데, 그런 인간 말종들이 어찌 예수에게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 예수의 재림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구원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는 정죄받는 기호가 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거나 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말고,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이 되지 말며,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너희에게 충고하겠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마라. 또한 제멋대로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지 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적어도 겸손한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를 듣고 코웃음 치는 사람들은 다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고, 진리를 듣고도 멋대로 단정 짓거나 정죄하는 자들은 다 교만한 자들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다른 이를 저주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다. 너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리의 도를 듣고 생명의 말씀을 본 후, 그 말씀 중에서 단 만분의 일이라도 너의 생각과 일치하고 성경과 일치한다고 여겨진다면, 너는 그 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말씀에서 계속 찾고 구하여라. 나는 또 네게 자신을 과신하거나 높이 여기지 말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미약하게나마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의 마음에 더 큰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고 자꾸 생각해 보면, 너는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과연 진리가 맞는지, 생명이 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혹자는 몇 마디 보지도 않고 “이것은 성령의 깨우침에 불과해.”라고 하거나 “이것은 거짓 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거야.”라며 맹목적으로 정죄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그야말로 너무나 무지하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과 지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지극히 적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한다! 너희는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을 맹목적으로 정죄해서는 안 되고, 미혹될 것이 두려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여러 번 살펴보고도 이런 말씀이 진리도 길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너는 결국 징벌받을 사람이고, 복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진리를 이렇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였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올 복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잘 생각해 보아라! 경솔하게 굴지도, 덤벙대지도 말라. 하나님 믿는 일을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지도 말라. 자신의 종착지와 앞날, 자신의 생명을 생각해야지, 스스로를 우롱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이 말들을 다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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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호칭과 신분에 관하여>(발췌문 165)

 

하나님의 각 단계 사역은 모두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은 창세부터 지금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맞물려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닦는 사람이 없었다면 뒤에 온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뒤에 올 사람이 있었으니 길을 닦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사역은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씩 전해 내려오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이어질 수 있었다. 길을 여는 자가 없다면 사역은 전개될 수 없고, 하나님은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단계든 어긋나지 않고 전부 순서대로 이어져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한 분의 영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길을 연 자든, 길을 이은 자든, 결코 신분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요한은 길을 열었고 예수는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신분이 요한의 신분보다 낮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여호와는 예수보다 먼저 역사했다. 그렇다고 여호와가 예수보다 크다고 할 수 있겠느냐? 길을 닦거나 잇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의 본질과 대변하는 신분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려는 이상, 그는 반드시 길을 닦는 사람을 일으켜 사역하게 해야 했다. 요한은 처음에 전도할 때,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쳤다. 그는 처음부터 이 도를 전했다. 왜 그는 이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 말을 한 전후를 따지자면 요한이 먼저 천국의 복음을 말했고, 그다음에 예수가 말했다. 사람의 관념대로라면 요한이 새로운 길을 열었으니, 그가 예수보다 당연히 커야 한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통해 길을 열고 주의 길을 예비했을 뿐이다. 그는 예수를 위해 길을 닦았지만, 예수의 사역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사람의 사역 또한 전부 성령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여호와가 길을 이끈 시대였다. 여호와의 사역은 구약의 모든 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에서 행한 모든 사역을 대표한다. 모세는 그저 땅에서 그 사역을 지켰을 뿐이다. 그의 사역은 인성 협력에 속한다. 당시 여호와는 음성을 발해 모세를 불렀고,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서 모세를 일으켰으며, 모세가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해 가나안에 들어가게 했다. 그것은 여호와가 친히 지시한 일이지, 모세가 스스로 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으로 불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율법도 정했다. 하지만 그 율법은 여호와가 친히 반포한 것으로, 단지 모세에게 전하게 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계명을 정했다. 게다가 구약의 율법을 폐하고 새 시대의 계명을 정했다. 어째서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겠느냐? 이는 같은 맥락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모세가 한 사역은 시대를 대변한 것이 아니며, 새로운 길을 연 것도 아니었다. 여호와가 앞에서 길을 이끌고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한 것이었다. 그는 그저 쓰임 받는 사람에 불과했다. 예수가 왔을 때, 요한은 이미 길을 닦는 단계의 사역을 마치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성령이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와서 바로 그 자신의 사역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모세의 사역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도 그렇게 많은 예언을 했는데, 어째서 그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겠느냐? 예수는 그렇게 많은 예언을 하지 않았는데도 왜 하나님 자신이겠느냐? 당시 예수가 했던 사역이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아무도 단언할 수 없었고, 또한 전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한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이 분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역과 예언들도 직접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고, 여호와의 묵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그리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말씀도, 매우 많은 예언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이 보기에 그렇게 높은 도를 전하지도 않은 것 같지만, 그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는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요한이나 이사야, 다윗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을 신이라고 부른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다윗 신이나 요한 신이라고 그렇게 부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예수만을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이는 하나님의 증거와 그가 담당한 사역, 그리고 그가 이행한 직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다윗, 여호수아, 다니엘, 이사야, 나아가 요한과 예수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나오는 큰 인물들이 행한 사역을 통해 너는 누가 하나님 자신이고, 누가 선지자에 속하고, 누가 사도에 속하는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이고, 누가 하나님 자신인지는 그들이 행한 사역의 본질과 유형에 따라 구분되고 확정된다. 네가 이러한 것들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인 이유가 그렇게 많은 말씀과 사역을 하고 더욱이 수많은 이적을 나타냈기 때문이라면, 요한도 그렇게 많은 일과 많은 말을 했고, 모세도 마찬가지인데 왜 그들은 하나님이라고 불리지 못하느냐? 아담은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는데, 왜 하나님이라고 불리지 않고 그저 피조물이라고 불리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오늘날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사역과 말씀을 하셨다고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모세도 그렇게 많은 말을 했으니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겠죠?”라고 묻는다면, 너는 그에게 “하나님은 왜 당시에 예수님을 하나님 자신이라고 증거하셨으면서 요한을 증거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요한은 예수님 앞에 있지 않았습니까? 요한이 한 사역이 큽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큽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요한이 한 사역이 크고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작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요한을 증거하지 않으셨을까요?”라고 반문하여라.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 자신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고 직접 이끌었다. 이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이다. 모세에게는 그런 영과 어떠함이 없었고, 그는 그 사역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일과 예수가 한 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행하는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인지, 선지자인지, 사도인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인지는 사역의 성질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너는 의문이 없어질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는 어린양만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역대로 수많은 큰 인물들이 성경을 해석했다고 해서 너는 그들을 전부 어린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의 해석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그저 성경 해석가일 뿐,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신분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곱 인을 뗄 수 있겠느냐? ‘어린양만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일곱 인을 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 사역은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는 김에 곁들여 하는 사역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사역을 똑똑히 알고 있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 굳이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6천 년 사역에 굳이 ‘어린양이 성경을 해석하는 시대’를 더해야겠느냐? 그는 새 사역을 하기 위해 왔다. 다만 과거의 사역에 대해 조금 풀어 주어 사람이 6천 년 사역의 실정을 알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구태여 많은 성경 구절을 해석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하는 사역이다. 너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곱 인을 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역을 하기 위해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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