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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찬양 CCM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가사 버전)

 

1

하나님 이름 안 변한다 하면 왜 여호와는 예수가 됐느냐?

메시야가 온다고 했는데 왜 예수가 왔느냐?

하나님 이름 변했으니 새로운 사역도 가능한 법

하나님은 하나님이니 그의 사역과 이름 변해도 성품과 지혜 변하지 않으리

하나님은 하나님이니 그의 사역과 이름 변해도 성품과 지혜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

2

여호와 사역을 예수의 사역이 이어 갔듯이

예수의 사역도 다른 사역이 이어받으면 안 되느냐?

여호와 이름 예수로 변했듯 예수 이름도 바뀔 수 있는 법

사람의 머리 단순해 그럴 뿐 놀랄 일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니 그의 사역과 이름 변해도 성품과 지혜 변하지 않으리

하나님은 하나님이니 그의 사역과 이름 변해도 성품과 지혜 변하지 않으리

하나님 이름이 예수뿐이라 하면 너의 식견이 부족한 것이라

율법시대도, 마지막 시대도 끝내는 이름이 ‘예수’라고

예수만이 하나님 이름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예수의 은혜가 시대를 끝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이니 그의 사역과 이름 변해도 성품과 지혜 변하지 않으리

하나님은 하나님이니 그의 사역과 이름 변해도 성품과 지혜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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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찬양 CCM <말세에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하나님>(가사 버전)

 

1

말세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

사람은 말씀으로 크게 변하고

말씀 받아들인 사람의 변화는 은혜시대에 이적을 보고 기적을 본 사람들보다 큰 법

은혜시대는 안수 기도 함으로 사람에게서 귀신 쫓아냈지만

사람의 패괴는 그대로 있기에 패괴는 그대로

사람의 패괴는 그대로 있기에 그대로

2

치유받고 사함 받은 사람이지만 패괴 성품 없애는 사역을 아직 거치지는 않았으니

믿음으로 구원받았을지라도 죄짓는 본성은 남아 있음이라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 통해 죄 사함을 받긴 하였으나

사람의 죄는 아직도 그 안에 아직도 그 안에

사람의 죄는 아직도 그 안에 아직도

3

그 단계의 사역이 끝난 후에도 심판의 사역이 남아 있으니

말씀으로 사람 정결케 하고 실행의 길로 이끄는 사역

십자가 사역 끝났으니 사람은 속죄 제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았음이라

하나님이 사탄을 이겼음이라

하나님이 사탄을 이겼음이라 사탄을 이겼음이라

사람에겐 아직 패괴 성품 남았기에 계속 죄지으며 하나님께 저항하니 하나님은 사람을 얻지 못했음이라

이에 말씀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 들추어 적합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이라

4

의미와 성과가 더 큰 이 단계 사역

말씀이 사람에게 생명 공급해 성품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철저한 사역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말세에 육신으로 오사 성육신의 의미를 완전케 하고 구원 계획을 완성했음이라

사람은 말세에 말씀으로 심판받고 정결케 되리

사람은 말세에 말씀으로 심판받고 정결케 되리

사람은 말세에 말씀으로 심판받고 정결케 되리

사람은 말세에 말씀으로 심판받고 정결케 되리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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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찬양 CCM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다>(가사 버전)

 

1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네게 행하신 일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 공과를 배우라

그가 이 땅에서 사람에게 행하고 보여 주신 것은 그를 사랑하고 알게 하기 위한 것

사람이 하나님 위해 지금까지 고난받으며 올 수 있었던 건 그의 사랑과 구원 때문이고

그가 사람에게 행하신 심판과 형벌 사역 때문이라

그의 심판과 형벌이 없었다면 시련과 고난 겪게 하지 않았다면 그를 사랑했겠느냐?

사역이 크고 고통받을수록 사역의 의미 크다 할 수 있고 참되게 그를 사랑하게 되니

연단과 시련 없이 어찌 그를 사랑하겠느냐?

은혜와 자비만 베푸신다면 그를 진실로 사랑하겠느냐?

2

시련 가운데서 사람이 자기가 얼마나 비열하고 천박하며

가진 것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라

시련 가운데서 사람이 그가 예비하신 상황 통해

그의 사랑스러움을 체험케 하기 위함이라

고통이 크고 견디기 힘들어 비통한 마음도 들겠지만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역인지 알게 되고 오직 이것을 바탕으로 그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리

그의 심판과 형벌이 없었다면 시련과 고난 겪게 하지 않았다면 그를 사랑했겠느냐?

사역이 크고 고통받을수록 사역의 의미 크다 할 수 있고 참되게 그를 사랑하게 되니

연단과 시련 없이 어찌 그를 사랑하겠느냐?

은혜와 자비만 베푸신다면 그를 진실로 사랑하겠느냐?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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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찬양 CCM <말세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아야 정결케 되리라>(가사 버전)

1

말세에 예수 강림은 알지만 어떻게 오실지 너는 아느냐?

속량됐으나 온전케 안 된 너희 어찌 하나님 마음에 합하리?

여전히 옛 모습인 네가 죄에 속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구원 때문이라

하지만 죄가 없는 건 아니라 변화 없이 어찌 성결해지리?

두 번째 성육신은 속죄 제물 되지 않고 속량받은 자를 철저히 구원하시니

죄 사함 받은 자는 정결해지고 성품 변화되어 사탄 권세 벗어나 보좌 앞에 돌아오리

이렇게 사람은 완전히 성결해지리

2

안이 더럽고 비열한 네가 예수와의 강림을 꿈꾸느냐?

너는 속량만 됐을 뿐 아직 변화되지 않았느니라

그의 마음에 합하려면 그가 친히 사역해 널 정결케 해야 하시니라

두 번째 성육신은 속죄 제물 되지 않고 속량받은 자를 철저히 구원하시니

죄 사함 받은 자는 정결해지고 성품 변화되어 사탄 권세 벗어나 보좌 앞에 돌아오리

이렇게 사람은 완전히 성결해지리

3

속량만으로 성결할 수 없고 그와 복 함께 누릴 수 없는 법

변화와 온전케 되는 중요한 과정이 빠졌기에

속량된 죄인인 너는 그의 유업을 이어받을 수 없음이라

두 번째 성육신은 속죄 제물 되지 않고 속량받은 자를 철저히 구원하시니

죄 사함 받은 자는 정결해지고 성품 변화되어 사탄 권세 벗어나 보좌 앞에 돌아오리

이렇게 사람은 완전히 성결해지리

 

― ≪어린양을 따르며 새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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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너희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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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태도를 알고 하나님에 대한 각종 오해를 버려라

너희가 지금 믿고 있는 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는 악인의 악행을 보면 증오할까? (네.) 그는 우매한 사람의 잘못을 보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슬퍼하십니다.) 그는 사람이 제물을 훔쳐 먹는 것을 보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증오하십니다.)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사람이 하나님을 흐리멍덩히 믿으면서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너희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 ‘흐리멍덩한’ 태도는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 아니니 사람은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상대하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이런 자를 경시하고 멸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해 차갑게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한쪽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즉, 깨우침과 빛 비춤, 채찍질과 징계 등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열외로 취급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하고 자신의 행정을 거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극도로 혐오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슬러 노하게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 극도로 노한다! ‘노’는 일종의 정서이고 심정일 뿐 명확한 태도를 뜻하지는 않지만 이런 정서와 심정은 그 사람에게 어떠한 결말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이 극도로 혐오하는 결말이다! 그렇다면 ‘극도로 혐오’하여 초래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일단 상대하지 않고 한쪽에 내버려 두었다가 ‘추수 후’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그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런 사람에게 결말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 부류 사람들에게 결말을 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지금 이런 자들을 상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정상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느냐?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자신의 행위로 초래된 나쁜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이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 명확히 알려 주겠다. 어떤 환상도 가지지 말고, 더 이상 그 어떤 요행심도 품지 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용을 끝없이 베풀지 않을 것이고, 사람의 과오와 패역을 한없이 참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도 그 부류의 사람들을 몇몇 만나 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큰 감동을 받아 눈물 흘리며 통곡하더군요. 평소에도 무척 즐거워하는 걸 봐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것 같았어요.”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눈물 흘리며 통곡한다고 해서 꼭 하나님께 감동받거나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했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도하겠느냐?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도태시키고 포기하려고 작정했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의 결말은 없어진 것이다. 그가 기도하며 스스로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크든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이미 그를 혐오하여 포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앞으로 그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가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한 그 순간 그의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약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 하나님은 그를 남겨 두었다가 벌을 받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본질에는 사랑이라는 요소가 있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다. 하지만 사람은 그의 본질에 존엄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잊어버린다. 그에게 사랑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그를 제멋대로 거슬러도 아무 느낌과 반응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 긍휼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원칙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진실로 존재하는 분이지, 사람이 상상해 낸 목석이나 어떤 물체가 아니다. 그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마땅히 매 순간 그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태도를 중시하며, 그의 느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상상으로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되고,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바라는 바를 하나님께 강요하여 사람의 방식과 상상대로 사람을 대해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그건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이 심각성을 알았다면 너희 모두 조심스럽게 행하고, 말하며, 하나님을 대할 때 부디 신중하고 또 신중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를 권고한다!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함부로 말하지도, 일을 하지도 말며, 함부로 딱지를 붙이지 말고, 함부로 결론짓는 일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리면서 구해야 한다. 이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행실이다. 네가 우선 이렇게 행할 수 있고 이런 태도를 갖출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네가 무지몽매하고 사리를 모른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너의 태도로 인하여 너를 기억하고 인도해 깨우쳐 주거나 혹은 어리고 무지한 너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이다. 그와 반대라면, 함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며 정의를 내리는 너의 오만불손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정죄하고 징계할 것이다. 나아가 너에게 벌을 주거나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결론은 아마 너의 결말과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너희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대함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일해서도 안 된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 단순한 일일지라도 마음속으로 많이 되새겨 보고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 네가 정말 언제 어디서나 매사에 이런 원칙에 따라 실천하고, 특히 네가 모르는 일에서도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너를 인도하며 실천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사람이 어떤 행실을 보이든 하나님 쪽에서는 모든 걸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고 있을 것이며, 너의 행실에 따라 정확하고 합당한 평가를 내려 줄 것이다. 네가 마지막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은 너의 모든 행위를 종합하여 너의 결말을 정할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탄복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행한 모든 것과 마음속으로 생각한 모든 것이 너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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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소개

 

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발췌문 11)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방법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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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74)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육신이 받은 고난은 어떤 것이었겠느냐?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자가 있겠느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의 본질을 몰라 항상 그를 사람처럼 대함으로써 서글프고 억울하게 만들었으니 그 고통이 실로 너무 크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은 무고하고 죄가 없음에도 사람과 똑같이 고통받고, 사람과 함께 박해와 비방, 수모를 당하며, 아울러 그를 따르는 자들의 오해와 패역도 참아 내야 했으니 그 고통은 정말이지 헤아릴 수도 없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너희가 말하는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께 있어서 진정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그에게는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에게 진정한 고통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무엇이 진정한 고통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 고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하나님이 마치 아주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한 기간에 인류에게 본체를 나타내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지 못하고, 늘 이렇게 자신을 낮춰 보잘것없는 육신에 은밀히 거하니 매우 괴로우리라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선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깊은 동정심을 보인다. 심지어는 종종 이를 소소하게 찬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느끼는 고통과 다르고 거리가 멀다. 너희에게 사실을 말해 주겠다. 하나님의 영이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든, 하나님에게 있어 위에서 말한 것들은 다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단지 성육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받은 고통을 말해 보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평범한 정상인이 되었을 때, 그는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생활한다. 그럼 사람의 생존 방식, 법칙, 이념을 보고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는 그러한 생존 방식과 법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혐오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왜 혐오하겠느냐? 인류의 생존 방식, 법칙은 무엇이더냐? 어떤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졌더냐? 무엇을 근거로 삼았더냐? 인류의 생존 방식, 생존 법칙 등 모든 것은 사탄의 논리와 지식, 철학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생존 법칙 아래 있는 인류에게는 인성도, 진리도 없으며, 전부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의 본질은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과 정반대이다. 그의 본질에는 공의, 진리, 거룩함 등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제가 충만하다. 이러한 본질을 갖춘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살아가니 그 심정이 어떠하겠느냐?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겠느냐? 고통스러운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거나 느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보고 듣고 접하고 체험하며 대면한 것들은 모두 인류의 패괴와 사악함, 진리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된다. 즉, 그는 패괴된 인류와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패괴가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 그와 공통된 언어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겠느냐? 인류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다.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고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 같으냐? 게다가 사람이 말하는 것, 좋아하는 것,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모두 죄, 그리고 사악한 시류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대할 때, 가슴이 미어지지 않겠느냐? 이러한 일을 대하는데 마음이 즐거울 수 있겠느냐?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와 함께 생활하는 자들은 패역과 사악으로 가득 찬 인류인데, 그의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이러한 고통이 대체 얼마나 큰지, 누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느냐? 누가 신경을 쓴 적이 있느냐? 누가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고통은 더욱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냉대와 무감각은 하나님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어떤 이들은 늘 그리스도의 처지를 동정한다. 성경에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이 있어 사람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것이 하나님이 받은 가장 큰 고통이자 그리스도가 받은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정말 그러하더냐? 하나님은 이를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단 한 번도 육신이 받은 고통 때문에 불평이나 억울함을 토로한 적이 없으며, 사람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갚으라고 한 적도 없다. 사람의 모든 것, 즉 패괴된 삶과 사악함, 사탄에게 통제받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 죄 가운데 살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는 모습을 목도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이 모든 죄악을 용납할 수 없었고 인류에 대한 혐오는 날로 커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참아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은 크나큰 고통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발현되지 못했고,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또한, 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위로해 보려고 하는 자도 없었다. 그는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 계속해서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인류에게 지불한 것에 대해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본질 때문에 인류의 사악함과 패괴와 죄악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고, 게다가 극도로 혐오하고 증오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육신은 이로 인해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것들을 너희는 보았느냐? 분명 너희 중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는 누구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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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73)

매일 말씀 묵상― 하나님 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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