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72)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모두 예수가 강생했을 때 일어난 많은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마왕에게 쫓긴 것으로, 온 성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까지 전부 살해당한 일이다. 이를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사람들 가운데 왔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인류 구원의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는 사역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새 사역을 사람들 가운데 전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적어도 기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며 직분 이행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더없이 즐거웠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준비한 끝에 드디어 정상인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마침내 사람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들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언어를 이용해 공급하고 인도하며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또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방식으로, 나아가 사람의 시각으로 인류와 사물,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은 육신 사역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같았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함에 위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났기에, 하나님이 느낀 위안은 실로 참된 것이었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이룰 때, 하나님이 기쁨과 위안을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때이자 구원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그때가 바로 그의 새 사역이 전개되고, 그의 경륜이 앞으로 나아가는 때이며, 더욱이 그의 뜻이 완전한 성취에 가까워지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인류에게 행운이자 더없이 좋은 일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단계의 사역을 펼칠 때는 하나님께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 이 새로운 사역과 시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실현될 때는 이 사역의 결과가 나타나고 이루어진 때이며, 하나님이 최종 효과와 성과를 거둔 때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성과에 만족해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가 찾고자 하는 사람을 보았고 확정하고 얻었으며, 그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를 만족게 할 수 있는 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슬픔을 내려놓았으며, 즐거움을 느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새 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역을 막힘없이 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느꼈을 때, 이미 결말을 보았으며, 이 결말로 인해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하나님이 그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나타내겠느냐? 상상이 되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되겠느냐? 하나님이 춤을 출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노래를 불러도 되겠느냐? 그 노래는 어떤 노래여야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마음속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며, 그 노래를 사람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만물에게 들려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고,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다양한 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고정된 생각을 가지거나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즐거움과 심정을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즐거워해서도, 울거나 눈물을 흘려서도 안 되며, 그 어떤 감정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자유와 해방을 허락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중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최소한 하나님이 왜 즐거워하고 슬퍼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질 것이며,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 혹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며, 너의 생명이 된 하나님이자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인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바람이 있느냐?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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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71)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주의 사랑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한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나타내고자 하는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해당 시기에 인자가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시대에 행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둘러싸고 이뤄지며,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으로 어떤 위치에서 표현하든 그의 목적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고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아울러 더 많은 경우에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 면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그의 목적은 사람이 다른 이를 용서할 때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바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도’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했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달았으며, 이 말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고,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또한, 이 비유로 사람은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다른 이를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말씀을 할 때의 위치와 배경을 사람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성의 각도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의 관념 속 상상이나 사람이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또는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그의 태도를 전했다. 그리하여 사람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행하는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직접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다. 방식도 훨씬 유연하고, 형식 면에서도 율법시대를 뛰어넘는다.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더냐?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핀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오직 사람만이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는 데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 안에 들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그의 성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자 발현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언가를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소유와 어떠함,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 그리고 소유와 어떠함을 더없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사귀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이나 장애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하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가 되었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 이 단계의 사역과 유사한 부분이 아주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적인 측면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면 인간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위치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에 있어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한 때는 바로 네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했을 때 성장 과정에서 인성으로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며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은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육신에서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현실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되고, 이에 사람은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그때는 인자가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使者)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 가운데서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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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69)

 

은혜시대에 예수가 했던 사역에서, 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육신을 통해 나타나며, 또한 인성을 통해 사람이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사람은 인자에게서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지니고 사는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며 신성을 나타내는 모습도 보았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발현된 모습을 통해 사람은 실제적인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에 대해 다양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반면, 창세 이후부터 율법시대가 끝나는 시점까지, 즉 은혜시대 이전에 사람이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은 모두 하나님 신성의 일면이었다. 즉, 하나님이 비물질적인 세계에서 행하고 말씀한 것, 사람이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참모습에서 발현된 것들이었다. 그러한 것들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너무 높고 큰 분이라 가까이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남겨 준 인상은 대부분이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였다. 심지어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마음도 사람에게 너무 신묘막측해서 도저히 종잡을 수도, 알 방법도 없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묵상하거나 체험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모든 것은 아주 요원해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마치 하늘 끝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알거나 혹은 하나님의 어느 한 가지 생각을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자 더욱이 아주 요원한 일이었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일부 구체적인 사역을 하면서 구체적인 말씀을 하고, 구체적인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체험하거나 볼 수 있는 분명한 인식을 갖게 했지만, 그것은 어쨌든 하나님이 비물질세계에서 나타낸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사람이 이해하고 알게 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성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이었다. 그러한 소유와 어떠함은 사람에게 구체적인 개념을 줄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상이 여전히 ‘가까이하기 어렵고,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체’라는 범위에 머물게 했다.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구체적인 물건이나 형상으로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여전히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항상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정하여 하나님을 물질화, 인간화하려는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생김새는 어떤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기호와 성격은 어떤지 등등이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사람의 필요 또한 잘 알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행한 것이다. 그 방식은 인성으로도 사역하고, 신성으로도 사역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사역한 기간에 사람은 하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아주 많이 보았다. 예를 들면, 그가 춤을 추고, 혼인 잔치에 참석하고,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고, 혹은 어떤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등의 모습이었다. 이와 함께 예수는 신성을 대표하는 사역도 많이 행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역은 다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고 발현된 것이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신성이 정상적인 육신에 실체화됨으로써 사람은 그를 보거나 만질 수 있었고, 또한 더 이상 하나님을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사람은 인자의 일거수일투족, 인자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거나 하나님의 신성을 알 수 있었다.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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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68)

 

너희는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내적 상태와 결부시킬 수 있느냐? 너는 실생활에서 먼저 자신이 경험한 사람, 일, 사물이 어떤 진리와 관련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진리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과 결부시킬 수 있다. 너에게 임한 일이 어느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도 모른 채 곧장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비교적 맹목적인 행동에 속하며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우선 너에게 닥친 일들이 어떤 유형의 일인지, 어느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네 체험에 상응하는 진리를 찾은 다음에 그 상응하는 진리에서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것은 어떤 규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거나 어떤 공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공식 같은 것이 아니며, 규칙도 아니다. 진리는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며, 살아 있는 것이다. 또한 피조물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칙이자, 사람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법칙이다. 너는 체험 과정에서 이러한 것을 많이 체득해야 한다. 너는 어느 정도까지 체험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수 없고 진리를 떠날 수 없다. 네가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현된 것이고, 진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자체가 바로 진리이다. 다만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나타내는 것을 진실되게 구현한 것일 뿐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전부 구체화하고 명문화했으며,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하게 하고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증오하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더욱 직설적으로 알려 준다. 하나님이 선포한 이런 진리의 이면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희로애락과 하나님의 본질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 성품의 발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체험을 통해서도 그 효과에 도달해야 한다. 사람이 실생활 밖에서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약간의 인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도리와 문자적 의미에 국한될 뿐, 진정한 하나님 자신과는 거리가 있다.

현재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내용의 범위는 모두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예전에 일어난 그 일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하나님이 일찍이 나타냈던 성품과 소유와 어떠함을 인식함으로써 더 광범위하고 더 깊이 있게, 더 다양한 측면에서, 다원적으로 하나님의 면면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직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면면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하나님이 한 말씀과 행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더 잘 알 수 있고 게다가 더 전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사람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례나 이야기들을 통해 사람이 좀 더 쉽게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현재 하나님이 선포한 심판과 형벌의 말씀, 진리들을 한 글자, 한 구절씩 분석하면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면, 너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공식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 속의 이러한 이야기들을 죽 열거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면, 사람은 지루하거나 재미없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사례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언어로 당시 하나님 마음속에 있던 구체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당시 심정, 즉 정서 혹은 마음과 생각까지 전부 사람에게 알려 주는 셈이다. 이러한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는 목적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공식도, 전설도 아니고,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며, 사람이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임을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게 하려는 데 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더 광범위하게 알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며, 또한 하나님이 나타낸 이러한 성품들을 통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과 인류에 대한 염려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더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인식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전부 느꼈으리라 믿는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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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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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64)

 

하나님의 더 많은 소유와 어떠함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구약이나 율법시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시작하자, 우리의 발걸음도 그에 따라 은혜시대, 즉 은혜와 구속으로 충만한 시대로 들어갔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또 한 번 처음으로 매우 중요한 일을 행하였다. 새 시대의 그 사역은 하나님께 있어서나 인류에게 있어서나 모두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점은 하나님이 또 처음으로 한 새 사역이며, 그 새 사역은 바로 사람도, 만물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일을 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류의 일원이 되어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과 신분을 지니고 그의 새 사역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새 사역은 그가 이미 율법시대의 사역을 끝냈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더 이상 율법 아래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율법의 형식으로, 율법의 원칙과 규례에 맞춰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즉, 율법을 위주로 하는 모든 사역은 영원히 멈추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사역, 새 일을 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또 새로운 시작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다음 시대로 인도해야만 했다.

그 일이 사람에게 희소식이 될지 흉보가 될지는 사람의 본질에 달렸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희소식이 아니라 흉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할 때, 율법의 조문과 규례만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흔히 지난 사역을 가지고 하나님의 새 사역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흉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은 순수하고 마음이 열린 자,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하는 자,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인류가 생긴 이래, 하나님이 처음으로 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생활했으며, 사람에게서 태어난 인자의 방식과 형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살면서 사역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처음으로 사람의 고정 관념을 깨뜨렸고, 또 모든 사람의 상상을 넘어섰으며, 아울러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실익’을 안겨 주었다. 하나님은 구시대를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의 오래된 사역 방식과 사역 ‘스타일’을 버렸다. 더 이상 그의 사자를 통해 그의 뜻을 전달하게 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구름 속에 ‘숨어’ ‘우렛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군림하며 사람에게 나타나거나 말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전과 완전히 다르게’ 사람이 생각지 못한 방식,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 즉 말씀이 육신 되어 인자의 모습으로 그의 그 시대 사역을 펼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에 인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고 난감해했다. 하나님이 또 한 번 전례 없던 새 사역을 행했기 때문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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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발췌문 63)

 

사람이 이해하고 인식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라면, 사람이 얻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생명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이 생명이 네 내면에 만들어지면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경외심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거둘 수 있는 성과이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 알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면, 심지어 그러한 일들을 따져 볼 생각도, 중요시할 생각도 없다면 내가 분명히 말해 주겠다. 네가 지금의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믿는 것을 추구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으며, 진정한 구원은 더더욱 받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최종적인 결과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새겨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믿음도 생기게 된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새겨보는 과정에서 점차 조금씩 하나님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을 때, 자신이 하나님과 했던 거래, 하나님께 했던 요구, 혹은 자신의 분에 넘치는 욕망이 얼마나 부끄럽고 비열한 것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진정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을 때, 너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큰 세계인지 보게 될 것이며, 네가 그동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경지에는 기만도 간사함도 없고, 어둠도 사악함도 없으며, 오직 진실함과 신실함, 광명과 정직함, 그리고 공의로움과 선함만 있을 뿐이며, 사랑과 배려, 긍휼과 관용이 충만하여, 너에게 사는 것의 행복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었을 때 하나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 어마어마하게 큰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으로 가득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권병으로 충만하다. 거기에서 너는 하나님의 다양한 측면의 소유와 어떠함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왜 기뻐하는지, 왜 근심하는지, 왜 슬퍼하는지, 왜 노하는지 등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열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네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야만 하나님이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고, 하나님이 너의 마음속에 들어와야만 너는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볼 수 있으며 너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또한 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너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이 얼마나 사랑할 만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에 반해 네 주위의 사람과 일, 사물, 심지어 너의 가족, 너의 반려자,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언급할 가치가 없고 보잘것없으며 비천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는 그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위해 더 이상 대가를 치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너는 자신을 낮춘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높고 큼과 지고지상함을 보게 되고, 더욱이 네가 예전에 별것 아닌 일로만 생각했던 하나님의 행사에서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와 하나님의 관용, 너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포용과 배려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너에게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너는 사람이 얼마나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주변 사람과 주변에서 일어난 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너에 대한 사랑과 이른바 ‘보호’ 혹은 너에 대한 걱정 모두 언급할 가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너의 최고의 사랑이자 최고의 보물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일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고, 하나님의 본질은 참으로 거룩하며, 하나님께는 간사함도, 사악함도, 질투도, 분쟁도 없고, 오로지 공의와 진실함만 있으며,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모든 소유와 어떠함을 사모하고 추구하고 동경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람이 여기까지 이를 수 있는 토대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을 알아 가는 것은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배워야 하는 공과이자, 성품 변화와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모든 이가 평생 추구해야 하는 목표인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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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57)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적이 되었는데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사람의 본성과 본질, 그리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하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느냐? 악에서 떠난 사람이 맞느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표현으로 개괄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하나님의 원수’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실제 의미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표현에는 본질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원수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목적과 야심도 들어 있지 않고 어떤 저의도 없는 초심을 가졌던 자가 누가 있느냐? 설사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존재함을 보았을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 최종 목적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 체험 과정에서 늘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한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가정도 직장도 내려놓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주셨지? 그동안 내가 무슨 복을 받았는지 한번 계산해 보고 따져 봐야겠어.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헌신하고 노력을 들이며 많은 고난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동안 내가 한 것에 대해 어떤 약속을 해 주실까? 하나님은 나의 선행을 기억해 주실까? 나의 결말은 도대체 어떨까? 복은 받을 수 있을지?’ 모든 사람은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계산하고, 저의와 야심을 품고, 또한 하나님과 거래하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뭘 얻어 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상대로 계산하고, 자신의 결말을 두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논쟁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며 하나님께 구두 증거를 구걸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거래를 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려고만 한다. 심지어는 갈수록 더 심해지고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끊임없이 하나님과 논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련이 임하거나 어떤 환경에 처하면 늘 나약해지고 일을 태만히 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수분이나 만물 상자로 삼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큰 채권자로 간주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약속을 얻어 내는 것이 생득적 권리이자 책무라고 생각하고, 반면에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며 사람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해야 할 책임이라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이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이기도 하다. 사람의 본성과 본질로부터 사람의 주관적인 추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과는 아예 관련시킬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고,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상태를 볼 때, 사람의 본질은 뻔한 것이다. 이 본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씨가 악독하고 음험하고 간사하며,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게다가 비열하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태껏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했으며, 사람의 경배를 받지 못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행하든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공급하든지 간에, 사람은 봐도 못 본 척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사람은 시종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자신이 주관하고 자신이 결정하려고 한다. 그 뜻인즉,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싶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사람들의 상태다. 다시 욥의 경우를 보자. 우선 그가 하나님과 거래를 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면서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느냐? 그때 하나님이 누구에게라도 이후의 결말에 대해 말씀한 적이 있느냐? 그때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결말에 대한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욥은 그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양자의 차이가 너무 크다. 같은 레벨의 사람이 아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을지라도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했다. 그는 하나님과 한 번도 거래를 한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께 그 어떤 지나친 기대나 요구를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고 여겼다. 이것은 욥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삶을 사는 과정에서 보고 얻게 된 성과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할 수 있는 성과도 얻었다. 이 두 구절은 그가 살며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보고 깨달은 것이다. 또 이 두 구절은 사탄의 시험을 이긴 가장 유력한 무기였으며,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설 수 있었던 초석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나눈 얘기로 볼 때, 너희는 욥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느냐?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냐? 너희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우냐? 너희는 하나님께 욥 같은 시련을 달라고 기도할 마음이 있느냐?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감히 그러한 기도를 드리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너희들의 믿음은 보잘것없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과 비교하면 너희들의 믿음은 정말 언급할 가치도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적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지도 못하고, 사탄의 공격과 참소와 시험을 이기지도 못한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겠느냐? 욥의 이야기에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이 구원받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나니, 이제는 욥과 같은 시련을 받아들일 믿음이 생겼느냐? 이제 자신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해야 하지 않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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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발췌문 47)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은 겉면을 본다고 나는 늘 말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살핌으로 사람의 본질을 아는 반면,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정의한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때, 욥의 세 친구 및 모든 영적 인물들은 그 행동에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생일을 비롯해 생명과 육체를 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저주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신성불가침한 것이자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리이다. 그런데 욥은 그 ‘관례를 위반’하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보통 사람들이 볼 때 금기를 깬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해와 동정은 물론, 하나님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의로움’에 의심을 품었다. 이는 그들이 욥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방종’해져 그렇게 경거망동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생전에 그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이 태어난 날이 멸망했으면 하고 저주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이 사람들이 욥을 정죄하는 증거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때 욥의 진짜 마음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또 욥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느냐? 그 실상과 이유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고, 또한 욥 자신만이 알고 있다.

사탄이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을 때, 욥은 마수에 걸린 것이었다. 그는 벗어날 수도 저항할 힘도 없었으며, 그의 몸과 영혼은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 ‘극한의 고통’을 통해, 욥은 육으로 사는 사람의 보잘것없음과 무력함, 유약함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욥은 하나님이 왜 인류를 염려하고 보살피는지, 하나님의 그 심정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마수에 걸려든 욥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도 무력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숨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하나님이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긴 한편, 욥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마음 아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욥의 상처로 말미암아 괴로워했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고, 또한 아까워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때의 욥은 육체 껍데기에서 벗어나 더 이상 육체로 인한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참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오는 고통까지도 참아 내야 했다. 하나는 육체에서 오고 하나는 마음에서 오는 이중의 아픔에 욥은 가슴이 찢어지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며, 참으로 속절없고 무기력한,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졌으며, 사탄을 증오하는 마음 역시 그에 따라 더 심해졌다. 그때의 욥은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지언정,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심히 증오하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도, 자기가 태어난 날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싫어졌다. 욥은 자신의 생일과 자신의 출생에 관련된 모든 것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욥 3:3~4). 욥의 말속에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또한 그 말에서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 때문에 자책하고 죄스러워하는 심정도 묻어났다.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이 두 마디는 그 당시 욥이 자신의 심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완전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때, 또 한편으로는 욥이 원했던 대로 욥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진정으로 승화되었다. 물론 이 ‘승화’는 하나님이 예정했던 결과였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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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발췌문 2)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품은 모두 인류에게 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때, 실천 과정에서 하나님이 말씀한 목적과 근원, 배경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성과를 알고 체득하게 된다. 사람에게 있어 이것들은 모두 진리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며,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 위해 반드시 체험하고 깨닫고 얻어야 하는 것들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체험하고 깨닫고 얻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차츰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또 서로 다른 정도의 인식을 갖게 된다. 이 이해와 인식은 상상해 내거나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이 깨닫고 체험하고 느끼고 실증한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깨달음과 체험, 느낌, 실증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내용이 생기게 된다. 이때의 인식이야말로 실제적이고 진실하며 정확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체험, 느낌과 실증을 통해 하나님을 진실로 이해하고 알아 가는 이 과정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진정한 사귐이다. 사람은 이러한 사귐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게 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본질에 대해 알고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점차 알고 이해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실제적으로 확신하고 정확한 정의를 내리게 되며,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본질적으로 확정하고 알게 된다. 사람은 이러한 사귐 속에서 점차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더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지 않고, 더는 자기 멋대로 추측하지 않으며, 더는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의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항변은 갈수록 적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반발심과 패역 또한 점점 줄어든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헤아림과 순종은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점점 실제에 가까워지고 깊어진다. 사람은 이러한 사귐을 통해 진리의 공급과 생명의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얻게 된다. 또한 이러한 사귐 속에서 성품이 변화되고 구원을 받게 되며, 동시에 피조물로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배하게 된다. 이러한 사귐이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더 이상 백지도, 구두 약속도 아니며, 맹목적인 추종과 숭배도 아니다. 이러한 사귐이 있어야만 사람은 생명이 나날이 자라고, 성품도 점차 변화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 막연한 신앙에서 점차 참된 순종과 헤아림, 나아가 참된 경외에 이르게 되며, 하나님을 따르는 것 또한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에서 점차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사귐이 있어야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며 인식하게 된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이론과 글귀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원점에 머물러 있고, 전설과 봉건 미신의 색채를 띤 전통적인 참배의 기초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원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며,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에 대한 확신을 제외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막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할진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진정한 경외심은 또 얼마나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얼마나 확신하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과 경외를 대체하지 못한다. 네가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얼마나 누렸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하지 못한다. 또한, 네가 얼마나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고 헌신하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하지 못한다. 어쩌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숙독하고 막힘없이 술술 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아무리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따르더라도, 지금까지 하나님과 진정으로 사귄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체험한 적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텅 빈 공백이나 끝없는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네가 한때 하나님과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적이 있고, 하나님과 얼굴을 맞댄 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은 여전히 비어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경외 또한 공허한 구호나 이상(理想)에 불과하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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