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발췌문 141)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후 줄곧 인류의 생활을 이끌어 주고 있다. 인류에게 복을 준 것, 율법과 계명을 정해 준 것, 생활에 관련된 많은 규칙들을 정해 준 것 등 하나님이 그렇게 행한 의중과 목적이 무엇인지 아느냐? 먼저 하나님이 한 이 모든 일이 모두 사람을 위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느냐? 너희에게 있어 이 말은 비교적 광범위하고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부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사람을 이끌고 인도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더냐? 규례나 율법을 지키게 해서라도 사람이 사탄을 경배하거나 사탄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최초의 목적이었다. 최초에 사람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간단한 율법과 규칙 등 여러 부분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규정들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인류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사랑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을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의도가 있느냐? (없으십니다.) 그럼 하나님의 이 목적은 정당하고 긍정적이냐? (네.) 하나님이 어떤 규정을 만들었든, 하나님이 역사하는 동안 이 규정들을 통해 이루려는 결실은 모두 사람에게 긍정적인 것이고 사람을 이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속에 사사로운 생각과 잡념이 있느냐? 다른 목적이 있거나 사람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것은 조금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을 할 때도 이러했고, 일을 할 때도 이러했으며, 또한 마음의 생각도 이러했다. 그 어떤 불순물이나 사사로운 생각과 잡념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을 위해서이다. 자신을 위한 목적은 없다. 그는 사람에게 계획이나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하는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인류를 위한 것이고, 인류를 보호하고 인류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 주기 위한 것이다. 이 마음이 귀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이런 귀한 마음을 사탄에게서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느냐? (아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탄에게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모두 하나님의 자연적 발현이다. 하나님의 사역 방식을 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이러한 율법과 말씀을 마치 긴고아처럼 모든 사람의 머리에 씌어 강요했느냐? 그런 방식으로 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 행했느냐? (이끌어 주시고 권면을 해 주셨습니다.) 협박하는 것이 있느냐? 너희에게 빙빙 돌려 말하는 경우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진리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이끌어 주느냐?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십니다.) 깨우침과 빛 비춤으로 진리에 맞지 않는 것들과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려 준다.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 방식을 보면서 그와 너의 관계가 어떻다고 느꼈느냐? 하나님이 가까이할 수 없는 높은 존재라고 느꼈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느꼈느냐? 거리가 없는 굉장히 가까운 사이로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이끌고 공급하며, 도와주고 붙들어 줄 때, 하나님은 정답고 존경스러우며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의 패괴를 꾸짖거나 너의 패역을 심판하고 징계할 때, 또 어떤 방식을 사용하느냐? 말씀으로 꾸짖지 않느냐? 환경이나 사람과 일, 사물로 징계하지 않느냐? (그렇게 하십니다.) 그 징계의 정도는 어떠하냐? 사탄처럼 사람을 해하는 지경까지 가느냐? (아닙니다. 사람이 감수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방식은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며 섬세하다. 또한 매우 애틋하다. 그리고 적절한 수위와 정도가 있어 너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이 감당하기 힘들게 ‘무조건 이래라저래라’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심지어 네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어떤 느낌이 들더냐? 하나님의 권병과 위력을 느낄 때는 어떤 기분이더냐?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때 하나님과 거리감이 느껴지더냐? 하나님이 무섭더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행사가 있었기에 모든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더냐? 사탄이 역사할 경우 이런 느낌이 들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진리와 생명으로 끊임없이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붙들어 준다. 사람이 연약하고 소극적일 때, 하나님은 “소극적으로 굴지 마라!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일이 뭐가 있느냐? 이렇게 연약하고 소극적인데 살아서 뭐 하겠느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며 강압적으로 말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할 권병이 있느냐? (네.) 하지만 이렇게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 때문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아낌과 사랑, 귀히 여김은 사람이 한두 마디로 명확하게 표현하거나 자랑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 본질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 방식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볼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고심, 사람에게서 이루려는 성과, 사람에 따라 취하는 다양한 방식, 또 어떤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려고 하든, 이 모든 하나님의 사역 방식과 이런 애쓰는 마음에서 그 어떤 사악함이나 간사함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사와 말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에게서 발현되는 모든 본질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느냐? (네.) 이러한 거룩함을 인간 세상이나 너희 자신에게서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 외에 사람이나 사탄에게서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에서, 하나님을 유일무이한 거룩한 하나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느냐? (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취한 여러 방식, 사람에게 알려 주고 일깨우고 권면한 것들 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이런 거룩한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해 이런 사역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을 완전히 사탄에게 넘겨줬다면, 너희가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해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어디 여기 온전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며 큰소리칠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랬을 겁니다.) 100% 그럴 것이다. 하고도 남았을 테지! 사람에 대한 사탄의 태도에서 사탄의 본성, 사탄의 본질이 하나님과 완전히 다름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대조되는 사탄의 본질은 무엇이냐? (사악함입니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하나님의 거룩함은 대조적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러한 발현과 거룩한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탄의 패괴 속에서, 그리고 그의 활동 반경 내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제 거룩함이 무엇인지, 또 거룩함을 어떻게 정의할지 모른다. 설령 네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낄 때도, 너는 이를 하나님의 거룩함이라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인식 간 차이가 이러하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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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발췌문 140)

 

사탄과 여호와 하나님의 대화

(욥 1:6~11)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2:1~5)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기에 나오는, 사탄이 한 이 두 구절의 말과 행동들은 하나님의 6천 년 경륜 중에서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한 대표적 사례이며, 사탄 본연의 모습이다. 너는 실생활에서 사탄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설령 봤더라도 사탄이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사탄을 대표한다. 네가 설령 이를 알았다 해도 정말 사탄이 말하는 것이라고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지금 여기서 사탄 스스로 한 말을 명확히 보았고, 사탄의 추악한 모습과 사악함에 대해 명확하고 뚜렷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탄이 한 이 두 구절의 말은 현재를 사는 사람이 사탄의 본성을 아는 데 큰 가치가 있지 않으냐? 이 두 구절은 현재 인류가 사탄의 추악한 면모와 본연의 모습을 아는 데 있어 간직할 가치가 크지 않으냐? 이 말은 비록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뜻은 잘 전달되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구나. 너희는 그 의미를 알면 된다. 사탄은 여호와가 하는 일을 거듭해서 공격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욥의 경외심을 참소하였다. 사탄은 여호와에게서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여호와를 진노케 하려 했다. 그래서 사탄의 이 말은 굉장히 도발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말해 보아라. 사탄이 이런 말들을 끝냈을 때, 하나님은 사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명확히 알지 않았겠느냐? (명확히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자신이 감찰하던 욥, 즉 하나님의 종이자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 순전한 자는 그런 시험을 이겨 낼 수 있었느냐? (네.) 하나님은 왜 그가 이겨 낼 수 있다고 단언했겠느냐? 하나님은 줄곧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할 수 있겠느냐? 사탄은 하지 못한다. 사탄이 설령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더라도, 그 사악한 본성으로는 절대 거룩한 것을 거룩하다고,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악한 사탄은 절대로 거룩함과 정의, 광명한 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질리지도 않는 듯 본능적으로 자신의 본성과 사악함,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일을 한다. 심지어 하나님께 징벌받거나 멸망당하는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완고하게 반항한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고 사탄의 본성이다. 그래서 사탄은 또 이렇게 말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너무 많이 얻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에게서 좋은 것을 얻어서 하나님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을 경외할 뿐이고, 하나님이 베풀었던 것들을 거두어 가면 바로 하나님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으로는 사람의 마음이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는다. 사탄은 사악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거룩함이고 경외심인지 모르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사탄이 사악하지 않으냐? 우리 교회를 제외한 각 종교 각 교파, 종교 단체 혹은 사회단체 모두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너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또한, 간음하는 자는 누구를 봐도 그 자신처럼 음란해 보이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의 눈에는 누구나 다 솔직해 보이지 않고 모두 거짓말쟁이로 보이며, 악인은 누구를 봐도 악하게 보여 늘 싸우려 든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다 솔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늘 속임수에 넘어가고, 사기를 당하며 늘 방비를 하지 못한다. 내가 이런 예를 든 것은 사탄의 이러한 사악한 본성이 부득이한 상황에서 일시적인 드러냄 혹은 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이거나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너희가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사탄은 본능적으로 그런 것이다! 좋은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한다. 사탄이 듣기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것은 너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사탄의 말이 듣기 좋고 완곡하고 부드러울수록 뒤로는 더 음흉하고 악독한 속셈을 숨기고 있다. 사탄이 한 이 두 구절의 말에서 너는 사탄의 어떤 면모와 본성을 보았느냐? (음험하고, 악독하며, 사악합니다.) 사탄의 주요 특징은 바로 사악함이다. 아주 사악하고 악독하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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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소개

매일 말씀 묵상<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4>(발췌문 139)

사탄과 여호와 하나님의 대화

----<말씀이 육신가운데 나타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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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발췌문 128)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해야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주재를 알지 못하는 탓에 늘 반항심과 패역한 태도로 운명과 마주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 그리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헛된 바람일 뿐, 언제나 좌절을 맛보게 된다. 영혼 깊은 곳의 몸부림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 고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낭비되고 있다. 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주재 탓인가, 아니면 사람의 운명이 나쁜 탓인가? 분명히 둘 다 틀렸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들이 선택한 길,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하나님이 너를 위해 계획하고 주재한 모든 것이 큰 은혜와 보호임을 알게 될 때, 고통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자유롭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에서 벗어나 예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창조주의 주재에 대해 진정으로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못한다. 창조주의 섭리를 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과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창조주의 권세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운명과 창조주의 권능에 극력 대항하여 초래되는 고통을 떨쳐 버리기 또한 쉽지 않다. 물론 참된 자유를 얻기 어렵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삶의 방식과 인생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생활 방식과 인생관, 추구, 소망과 꿈을 정리하고 분석한 다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조해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있는지, 올바른 인생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진리를 점점 더 깨닫는 삶을 살고 인성 있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다양한 삶의 목표와 방식을 반복적으로 살피고 자세히 분석해 보면 창조주가 인류를 창조할 당시의 뜻에 들어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창조주의 주재와 보살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고, 사람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이끄는 함정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함정을 멀리하며, 하나님께 삶을 맡겨 계획하고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에 순종하기만을 구하며,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쉽게 들릴지 몰라도 어려운 일이다.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기꺼이 협력하고 어떤 이는 꺼린다. 꺼리는 사람들에게는 협력하려는 생각과 의지가 없다.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다스리고 계획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벗어나려 하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계획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고, 자신의 힘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권세와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사람에게 슬픔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명예와 이익을 좇기 때문도, 운명에 맞서 안개를 뚫고 힘겹게 나아가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알고 나서도,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고집하고 수렁 밖으로 발을 빼지 못하며, 강퍅하고 끈질기게 실수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고 완고하게 창조주의 주재와 겨루고 끝까지 대항하면서 전혀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다 부서지고 피 흘리며 쓰러질 때에야 포기하고 되돌아선다. 이것이 사람의 슬픔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을 선택한 자는 현명하고, 도망치려는 자는 완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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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발췌문 112)

 

니느웨 사람들에게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

이어서 두 번째 단락인 요나 3장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이 말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직접 일러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한 말씀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하고자 했던 말씀이다. 이를 통해 니느웨 사람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말미암아 성을 멸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그 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40일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40일 안에 회개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니느웨 성을 소돔 성처럼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안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분명 단순한 선포가 아니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태도를 전달한 것이었고 또한 성안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이 경고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을 증오했음을 알려 주었다. 또한 그들의 악행이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이므로 성안 사람들의 목숨도 위태롭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대함에 있어 소돔 성 사람들과 전혀 달랐던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

여기서 ‘무너지리라’는 무슨 의미이냐? 사라진다는 뜻이다. 왜 사라질까? 누가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이냐? 물론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았기에 듣자마자 그 말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악독이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그들은 성과 함께 멸해질 것임을 알아차렸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후 어떻게 하였느냐? 왕부터 백성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성경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성 사람들은 소돔 성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소돔 성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공개적으로 대항하여 악에 악을 더했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은 그 선포를 들은 후 외면하거나 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신복(信服)하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신복’이란 무슨 의미이냐?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믿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따라 해석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곧 그렇게 할 것임을 믿고 기꺼이 회개하겠다는 뜻이다. 곧 닥쳐올 재앙을 앞두고 니느웨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느냐?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니느웨 사람들이 신복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성경에 따르면,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참으로 신복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금식을 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 이는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소돔 성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대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개를 표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니느웨의 백성뿐만 아니라 왕도 그렇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니느웨 왕의 회개

소식을 들은 니느웨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은 후 재에 앉았다. 그리고 니느웨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고 소나 양 같은 가축에게도 풀이나 물을 먹이지 말고,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에게 간절히 부르짖으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선포하였다. 니느웨 왕이 행한 일들을 살펴보면 그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회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보좌에서 일어난 후 왕의 의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이 일련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니느웨의 왕이 왕의 신분을 내려놓고 일반 백성처럼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왕위에 있을 때 행했던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 권력을 내려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는 것이다. 이때 니느웨 왕은 왕의 신분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와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였다. 또한 그는 성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라고 선포하였으며,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니느웨 성의 왕으로서 최고 지위와 권력을 갖고 있으므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무시하거나 홀로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는 데에 그칠 수도 있었으며,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보좌에서 내려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죄를 인정했으며, 성안의 사람들과 가축들 또한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명하였다. 니느웨 왕의 이러한 행동은 왕으로서 진정으로 행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하기 어렵고 하지 못했던 행동이자,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행동으로, 기념하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왕들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에게 대적하고 대항하게 하였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에게 부르짖으며 악행을 돌이켜서 여호와 하나님께 사함을 받고 징벌을 피하게 한 자는 없었다. 하지만 니느웨 왕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에게로 마음을 되돌리게 하였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도록 하였으며 왕위를 내려놓았다. 이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은 뜻을 바꾸고 진노를 거두어 성안의 사람들을 멸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니느웨 왕의 행동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기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타락한(직역: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를 인정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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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발췌문 119)

다섯 부류의 사람

첫 부류, 강보에 싸인 아기 단계

두 번째 부류, 젖 먹는 아기 단계

세 번째 부류, 젖을 뗀 아기 단계, 즉 유아 단계

네 번째 부류, 유아의 성장 단계, 즉 유년 단계

다섯 번째 부류, 생명의 성장 단계인 성년 단계

----<말씀은 육신에서 나타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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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8>(발췌문 178)

 

하나님은 하나님 선민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을 따른다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냐? 하나님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은 아니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만물의 하나님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만 역사하고 행사를 보여 주느냐? (아닙니다.) 그 범위는 전 우주이다. 작게 말하면 전 인류와 만물이고 크게 말하면 우주 전체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류 전체에게 역사하고 행사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전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3단계 역사와 하나님이 이전에 행했던 사역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인식한다면, 하나님을 한 범위에 국한시킨 것이고 하나님을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영향을 초래하게 될까? 하나님의 기묘함과 지고지상함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과 권세의 범위를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인식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주고 하나님의 참된 신분과 지위를 인지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인식한다면 그 한정된 만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범위를 넓히고 시야를 확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경영, 하나님이 주재하는 범위, 하나님이 주재하고 관리하는 만물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러한 인식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만물 중에서 만물을 주재하고 관리하며 또 만물에게 공급해 준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너는 자신이 만물 중의 하나이고 만물의 일원임을 진정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공급하고 있고, 너 또한 하나님이 주재하고 공급하는 것을 받고 있다. 이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물에는 만물의 법칙이 있고, 이는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 만물에는 만물 생존의 법칙이 있고, 이 또한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과 인류에게 필요한 것도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공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사람과 만물은 함께 숨 쉬고 함께 의존하며 살아가고,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목적과 만유를 창조한 가치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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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정복 사역의 실상 1>(발췌문 31)

 

말세에는 정복을 통해 만물이 각기 부류대로 나뉘게 한다. 정복은 말세의 사역이다. 즉, 각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것이 말세의 사역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어찌 각기 부류대로 나뉠 수 있겠느냐? 너희들 가운데서 하는, 각기 부류대로 나누는 사역은 전 우주에서 각기 부류대로 나누는 사역의 시작이다. 이후에는 각 지역, 각 민족도 다 이 정복 사역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기 부류대로 나뉘게 될 것이고, 모두 심판대 앞으로 돌아와 심판받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사물도 이 형벌과 심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한 각기 부류대로 나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부류에 따라 나뉜다. 만물의 결말이 가까이 왔고 온 천지가 끝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어찌 생존이 끝나는 날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너희의 패역한 행위가 얼마나 오래가겠느냐? 너희의 마지막 날이 다 눈앞에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날을 보지 못할 수 있겠느냐? 어찌 마지막에 선행에 대한 상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악을 행하는 사람이냐? 너는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들여 순종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들여 저주받는 사람이냐? 너는 빛 속의 심판대 앞에서 살고 있느냐, 아니면 어두운 음부에서 살고 있느냐? 네가 마지막에 상을 받을지 벌을 받을지는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의 행위와 너의 마음은 대체 어떠하냐? 지금 내가 너를 정복함에 있어, 너의 행위가 악인지 선인지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너는 나를 위해 얼마나 포기했느냐? 너는 나를 얼마나 깊이 경배하느냐? 네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의 결말이 과연 어떨지, 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대로 알려 주겠다. 나는 인류를 만들고 또 너를 만들었을 뿐, 너희를 사탄의 손아귀에 넘겨주지 않았고, 일부러 너희로 하여금 나를 거역하고 대적하게 해서 나의 징벌을 받게 하지도 않았다. 그런 재앙을 당하는 것은 모두 너희 자신의 마음이 너무 강퍅하고 너희의 행동이 너무 비열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럼 너희의 결말 역시 너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너희의 결말은 너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사람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또 네가 더 잘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지, 너에게 악을 행하라고 하는 것도, 일부러 너를 멸망의 지옥에 들어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때가 되어 심하게 고통받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면 그것은 전부 너의 죄 때문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 자신의 선이나 악은 너에게 가장 좋은 심판 아니겠느냐? 너의 결말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 아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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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말씀 묵상<서문>(발췌문 25)

 

사람이 은혜시대에만 머무르면 패괴 성품을 영원히 벗어 버릴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고유 성품을 알 수도 없다. 늘 풍성한 은혜 속에 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알거나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생명의 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얻지 못한다. 이런 신앙은 너무도 가련하다. 네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성육신 하나님이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행한 사역들을 하나하나 체험하고 나면, 너는 오랜 소망이 드디어 실현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또 이제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이 직접 발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 사역의 지혜를 알게 되었다고 느낄 것이며, 하나님이 이토록 실제적이고, 이토록 전능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것이다. 또한 이전 사람이 보지 못하고 얻지 못한 많은 것을 얻었다고 느낄 것이며, 이때 너는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네가 이전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한 사실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수확 없이 빈손으로 끝나고, 결국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죄명을 얻을 수밖에 없다. 진리와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은 두 번째로 성육신한 하나님, 전능자의 이름 아래로 돌아올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을 수 있고, 더 많고 더 높은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진정한 인생을 얻을 수 있고, 이전 사람이 못 봤던 이상(異象)을 볼 수 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계 1:12~16) 이 이상이 바로 하나님이 지닌 모든 성품의 발현이며, 또한 이 모든 성품의 발현이 바로 이번에 성육신한 하나님의 사역의 발현이다. 계속되는 형벌과 심판 속에서 인자는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는 방식으로 고유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형벌과 심판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인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모습이 바로 요한이 본 인자의 진실한 모습이다(물론 하나님나라시대의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이를 전혀 볼 수 없다).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은 사람이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고유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그의 본래 모습을 사람 앞에 나타낸다. 다시 말해, 인자의 고유 성품을 알게 된 사람은 인자의 본래 모습을 본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해서 사람이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나라시대의 하나님 사역을 하나하나 체험한 후에는 요한이 말한 촛대 사이의 인자의 모습, 즉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라는 말의 진정한 함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이처럼 많은 말씀을 한 이 평범한 육신이 확실히 두 번째로 성육신한 하나님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이 너무나 큰 축복을 받았다고, 최고의 행운아라고 진정으로 느낄 것이다. 너는 이런 축복을 받고 싶지 않으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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